{"content_id":"6vyimtslfx","slug":"gyeongsin-famine-1670-1671-relief-and-recovery","locale":"ko","schema_type":"Article","category":"case_study","category_name":"사례 연구","title":"경신대기근 1670~1671년 진휼과 회복 과정","summary":"경신대기근은 1670~1671년 조선 전역에 흉년과 전염병이 겹친 재난이다. 조정은 식량 지급과 부담 경감, 종자 지원으로 대응했으나 풍년 기록만으로 생활 회복을 단정할 수는 없다.","sponsorship_disclosure":null,"affiliate_disclosure":null,"commerce_disclosure":null,"author":{"name":"인조이스 편집팀","url":"https://injoys.com/ko/about"},"key_points":["경신대기근은 현종 재위 중인 1670~1671년에 흉년과 전염병이 겹친 재난이다.","1671년 조정은 여섯 도의 전세를 현지 진휼에 쓰도록 했다.","죽 지급과 건량 지급, 곡식 판매는 구호 방식과 이용 조건이 달랐다.","제주의 면포·보리 종자 지원은 생활 유지와 다음 농사의 재개를 함께 겨냥했다.","1672년에도 진휼이 이어졌으며, 호적 인구 감소는 사망자 수와 구분해야 한다."],"content_markdown":"경신대기근은 **1670~1671년** 조선에 흉년과 전염병이 겹친 재난이다. 현종 때 조정은 진휼과 부담 경감으로 대응했다. 종자 지원은 농사 재개를 뒷받침했다. 완전한 회복보다 구호의 성과와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된다.\n\n국사편찬위원회의 실록·『신편 한국사』를 확인한 시점은 2026년 10월이다.\n\n## 이름과 발생 시기\n\n경신이라는 이름은 경술년과 신해년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경술년은 현종 11년인 1670년이다. 신해년은 현종 12년인 1671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경신년 한 해에 일어난 기근이라는 뜻이 아니다.\n\n흉년은 농작물 수확이 평년보다 부족한 상태를 가리킨다. 기근은 먹을 것이 부족해 사람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태다. 이 사건에서는 흉작에 전염병까지 겹쳤다. 『현종실록』 행장은 피해 범위를 팔도로 서술한다.\n\n## 경신대기근 원인과 생활 기반의 붕괴\n\n원인은 농업 재해와 질병이 겹친 데서 찾아야 한다. [『현종실록』 행장](https://sillok.history.go.kr/popup/print.do?gubun=kor\u0026id=wra_200001)은 1670년 여름 가뭄을 기록한다. 같은 해 음력 5월과 7월에는 서리가 내렸다. 1671년에는 보리 흉작으로 식량난이 이어졌다.\n\n『신편 한국사』는 이러한 재난을 소빙기와 연결해 해석한다. 소빙기는 장기간의 기후 냉각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뭄·홍수·이상저온은 당시 농업을 위협한 배경이었다. 다만 특정 화산이나 태양 활동을 직접 원인으로 확정하지는 않는다.\n\n피해는 수확량 감소에만 머물지 않았다. 송시열의 상소는 가난한 농가의 경작 중단을 지적한다. 날씨가 나아져도 농사지을 사람의 힘이 부족했다는 설명이다. 식량난이 다음 농사를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진 셈이다.\n\n## 1670~1672년 대응 연표\n\n구호는 기근이 심해지는 동안 시작돼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아래 표의 월일은 실록에 적힌 음력이다. 1672년 조치도 포함해야 지원의 지속 기간을 이해할 수 있다.\n\n| 시기 | 사건과 조치 | 기록 |\n|---|---|---|\n| 1670년 여름 | 가뭄과 서리로 농업 피해 발생 | 『현종실록』 행장 |\n| 1670년 음력 8월 | 강화의 쌀을 서울로 옮겨 판매 | 『현종실록』 행장 |\n| 1670년 음력 10월 | 호조·진휼청·한성부에 곡식과 겨울옷 지급 명령 | 『현종실록』 행장 |\n| 1671년 음력 정월 | 여섯 도의 전세를 현지 진휼에 사용하도록 지시 | 『현종실록』 행장 |\n| 1671년 | 서울과 지방에서 구호 시행 | 『현종실록』 행장 |\n| 1671년 음력 9월 12일 | 정치화가 제주 부담 경감과 면포·보리 종자 지원을 보고 | 『현종개수실록』 권24 제3기사 |\n| 1671년 음력 11월 30일 | 송시열이 농가의 어려움과 진휼 부정을 지적 | 『현종개수실록』 권25 제2기사 |\n| 1672년 음력 정월 | 대동미 부담 경감과 진휼 방식 논의 지속 | 『현종실록』 행장 |\n\n## 전세를 현지에 남긴 전환점\n\n대응의 전환점은 중앙으로 보낼 세곡을 현지 구호에 돌린 조치다. 전세는 토지에 부과하던 세금이다. 곡식으로 거둔 세금을 운송하는 일도 백성에게 부담이었다. 조정은 그 곡식의 사용처를 재난 지역으로 바꾸었다.\n\n1671년 음력 정월 조치는 **여섯 도의 전세**를 대상으로 했다. 삼남은 충청·전라·경상을 뜻한다. 여기에 당시 원양도와 황해도·경기도가 포함됐다. 행장은 이를 봄철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쓰도록 했다고 전한다.\n\n전세의 현지 사용은 세금 전액 면제와 구분해야 한다. 거둔 곡식의 사용처를 바꾸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줄이거나 납부를 미루는 조치는 별도로 시행됐다. 구호 재원 확보와 부담 경감은 서로 다른 정책 수단이었다.\n\n## 경신대기근 진휼 방식의 차이\n\n진휼은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는 조치를 뜻한다. 당시에는 죽 지급과 건량 지급, 곡식 판매가 함께 쓰였다. 건량은 죽으로 조리하지 않은 마른 양식이다. 다음 표의 기능 구분은 기록된 지급 방식을 풀이한 것이다.\n\n| 방식 | 기록에 나타난 형태 | 기능과 구분점 |\n|---|---|---|\n| 죽 지급 | 구호 장소에서 죽을 끓여 제공 |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 제공 |\n| 건량 지급 | 마른 양식을 나누어 줌 | 양식을 받아 따로 소비하는 방식 |\n| 곡식 판매 | 관청이 확보한 곡식을 시장에 공급 | 구매가 필요하므로 무상 배급과 다름 |\n| 의복 지급 | 겨울옷이나 면포 제공 | 식량 이외의 생활 필요 지원 |\n| 부담 경감 | 세금·공물·노역의 감면 또는 납부 연기 | 가구에서 빠져나가는 자원과 노동 부담 완화 |\n\n행장은 서울의 죽 지급과 사대부의 건량 수령을 구분한다. 따라서 배분 방식에는 신분에 따른 차이도 있었다. 1672년 논의에서는 떠돌며 구걸하는 사람의 구제가 쟁점이었다. 건량 지급만으로 모든 처지에 대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n\n## 제주 지원과 다음 농사의 재개\n\n제주 지원은 당장의 생활 유지와 파종 지원을 함께 담았다. [1671년 음력 9월 12일 기사](https://sillok.history.go.kr/id/wrb_11209012_003)에 정치화의 보고가 남아 있다. 보고에는 공물·노역 경감과 면포·보리 종자 지원이 등장한다. 이는 식량 지급을 넘어선 대응이었다.\n\n면포는 옷감을 마련하는 데 쓰이는 물자다. 보리 종자는 다음 농사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부담 경감은 가구가 내야 할 물자나 노동을 줄이는 조치였다. 각각 생활 유지와 생산 재개의 다른 부분을 뒷받침했다.\n\n다만 지원 결정과 수확 회복은 같은 사실이 아니다. 이 기사는 제주 전체의 회복 정도를 보여주는 통계가 아니다. 종자가 모든 농가에 얼마나 도달했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생산 회복을 지원했다는 범위에서 의미를 읽어야 한다.\n\n## 풍년 뒤에도 구호가 이어진 이유\n\n풍년이 들었다는 기록만으로 모든 가구의 회복을 뜻하지는 않는다. 행장은 1671년에 팔도가 풍년이었다고 평가한다. 반면 송시열은 그해 가난한 농가의 경작 중단을 지적했다. 두 기록은 수확 상황과 가구별 생활을 다르게 비춘다.\n\n[1671년 음력 11월 30일 상소](https://sillok.history.go.kr/id/wrb_11211030_002)는 노동력 부족을 원인으로 들었다. 농사를 짓지 못한 가구는 수확의 혜택을 얻기 어려웠다. 송시열은 이런 가구에 구호가 계속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풍년과 굶주림이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n\n행장에는 **1672년 음력 정월**에도 진휼 논의가 나온다. 같은 달 대동미 부담을 줄이는 조치도 기록됐다. 따라서 사건의 명칭상 기간과 구호의 종료 시점은 다르다. 1671년을 완전한 피해 극복의 해로 단정하기 어렵다.\n\n## 지원 결정과 실제 도달의 차이\n\n지원 명령의 존재만으로 구호가 제대로 전달됐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송시열은 일부 현장에서 구호 인원을 부풀렸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담당자들이 남는 쌀을 사적으로 차지했다. 중앙의 늦은 결정도 구호를 지연시킨 문제로 지적됐다.\n\n이 상소는 행정의 여러 단계를 나누어 읽게 한다. 조정의 승인과 현장의 배분은 별개의 과정이다. 수령자의 생활 개선은 그 뒤에 확인해야 할 결과다. 아래 구분은 상소를 바탕으로 정리한 해석이다.\n\n| 확인 단계 | 기록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 | 별도로 확인할 내용 |\n|---|---|---|\n| 정책 결정 | 구호를 명령하거나 물자를 배정함 | 실제 집행 시기 |\n| 현장 배분 | 구호 인원과 지급 상황을 보고함 | 보고의 정확성과 물자 누락 |\n| 생활 회복 | 경작·식량 사정에 대한 평가가 남음 | 지역별·가구별 회복 차이 |\n\n지급이라는 말도 항상 무상 지원을 뜻하지는 않는다. 행장에는 일부 건량 수령분의 징수 면제 조치가 나온다. 대상은 수령자가 사망하고 토지도 없는 경우였다. 따라서 지급 방식과 상환 조건은 따로 확인해야 한다.\n\n## 기록과 해석\n\n이 사건은 실록의 서술과 후대 연구를 구분해 읽어야 한다. 행장은 왕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하는 글이다. 상소는 신하가 문제를 제기하며 정책을 건의하는 문서다. 두 기록 모두 작성 목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n\n### 기록이 말하는 대응과 비판\n\n행장은 현종의 구호 조치와 성과를 강조한다. 송시열의 상소는 구호의 부정과 지연을 문제 삼는다. 상소의 비판을 전국 모든 현장의 실태로 확대할 수는 없다. 반대로 행장의 긍정적 평가만으로 피해 회복을 확정해서도 안 된다.\n\n### 연구에서 설명하는 사회적 영향\n\n[『신편 한국사』](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30_0050_0030_0020\u0026whereStr=)는 재난을 인구와 군역 문제에 연결한다. 군역은 군 복무나 이를 뒷받침하는 부담을 뜻한다. 대기근은 기존 군역 규모를 유지하기 어려운 배경이 됐다. 이를 계기로 부담 구조를 바꾸자는 논의가 힘을 얻었다는 해석이다.\n\n호적 수치에도 행정 목적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 나온다. 군역 대상자를 찾아내는 조사 강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적에 오른 인구와 실제 전체 인구는 구분해야 한다. 해당 연구의 해석을 모든 인구 추정의 합의로 볼 수는 없다.\n\n### 사망자 수는 어디까지 확인되는가\n\n호적 인구의 감소분을 곧바로 사망자 수로 계산할 수는 없다. [『국사관논총』의 인구변동 표](https://db.history.go.kr/id/kn_096_0010_0020_0020)는 서로 다른 기록을 나란히 제시한다. 같은 해에도 자료별 등록 인구가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는 그중 『조선왕조실록』 계열 수치다.\n\n| 구분 | 등록 인구 | 수치의 의미 |\n|---|---|---|\n| 1669년 | 5,164,524명 | 비교 시작 시점의 호적 인구 |\n| 1672년 | 4,695,611명 | 비교 종료 시점의 호적 인구 |\n| 1669~1672년 감소분 | 468,913명 | 등록 인구의 차이이며 사망자 확정치가 아님 |\n\n이 차이에는 사망 외에 이동과 조사·등록 조건도 개입할 수 있다. 전국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이 표만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실제 인구의 회복 시점도 연구 방법에 따라 검토가 필요하다. 숫자를 인용할 때는 자료명과 비교 연도를 함께 밝혀야 한다.\n\n## 오늘날 재난 대응사에서의 의미\n\n이 사례는 식량 공급과 생산 회복을 나누어 분석하게 한다. 곡식이 있어도 농사를 재개하지 못한 가구가 있었다. 구호를 결정해도 전달 과정에서 누락과 지연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기록에서 확인되는 서로 다른 문제다.\n\n제주 종자 지원은 다음 생산을 위한 조치였다. 전세의 현지 사용은 구호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이었다. 송시열의 비판은 집행 과정의 검증 필요성을 드러낸다. 현대 제도의 직접 기원으로 단정하지 않고 비교할 수 있는 지점들이다.\n\n## 자주 묻는 질문\n\n### 경신대기근은 언제 발생했는가?\n\n현종 11~12년인 1670~1671년에 발생했다. 경술년과 신해년에서 이름을 땄다. 구호는 1672년에도 이어졌다.\n\n### 피해는 특정 지역에 한정됐는가?\n\n『현종실록』 행장은 팔도에 기근이 들었다고 기록한다. 서울과 지방의 구호가 함께 등장한다. 제주에도 별도의 물자 지원이 이뤄졌다.\n\n### 현종 혼자 구호를 담당했는가?\n\n국왕의 명령을 여러 기관과 지방 관리가 집행했다. 기록에는 호조·진휼청·한성부 등이 나온다. 실제 성과는 현장의 운영에도 달려 있었다.\n\n### 죽 지급과 곡식 판매는 같은 진휼인가?\n\n둘 다 식량난 대응에 쓰였지만 공급 방식이 다르다. 죽 지급은 조리한 음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곡식 판매는 구매를 전제로 한다.\n\n### 보리 종자를 지급한 이유는 무엇인가?\n\n보리 종자는 파종을 돕기 위한 물자였다. 당장의 식량 지원과는 기능이 다르다. 지급 결정만으로 실제 수확 회복까지 확인되지는 않는다.\n\n### 1671년 풍년이면 기근이 끝난 것인가?\n\n풍년 기록만으로 생활 회복을 단정할 수 없다. 송시열은 농사를 짓지 못한 빈민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이듬해에도 진휼과 부담 경감이 이어졌다.\n\n### 을병대기근과는 어떻게 다른가?\n\n을병대기근은 숙종 때의 별도 재난이다. 『국사관논총』은 1695~1699년을 관련 피해 시기로 다룬다. 두 사건의 인구 감소 수치를 섞어서는 안 된다.\n\n### 사망자가 468,913명이라는 뜻인가?\n\n그 수치는 1669~1672년 등록 인구의 감소분이다. 사망자만 집계한 숫자가 아니다. 정확한 사망 규모를 뜻하는 수치로 인용하면 안 된다.","content_html":"\u003cp\u003e경신대기근은 \u003cstrong\u003e1670~1671년\u003c/strong\u003e 조선에 흉년과 전염병이 겹친 재난이다. 현종 때 조정은 진휼과 부담 경감으로 대응했다. 종자 지원은 농사 재개를 뒷받침했다. 완전한 회복보다 구호의 성과와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된다.\u003c/p\u003e\n\u003cp\u003e국사편찬위원회의 실록·『신편 한국사』를 확인한 시점은 2026년 10월이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9D%B4%EB%A6%84%EA%B3%BC-%EB%B0%9C%EC%83%9D-%EC%8B%9C%EA%B8%B0\" class=\"an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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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a-label=\"시기\"\u003e1670년 음력 8월\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과 조치\"\u003e강화의 쌀을 서울로 옮겨 판매\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u003e『현종실록』 행장\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670년 음력 10월\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과 조치\"\u003e호조·진휼청·한성부에 곡식과 겨울옷 지급 명령\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u003e『현종실록』 행장\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671년 음력 정월\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과 조치\"\u003e여섯 도의 전세를 현지 진휼에 사용하도록 지시\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u003e『현종실록』 행장\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671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과 조치\"\u003e서울과 지방에서 구호 시행\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u003e『현종실록』 행장\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671년 음력 9월 12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과 조치\"\u003e정치화가 제주 부담 경감과 면포·보리 종자 지원을 보고\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u003e『현종개수실록』 권24 제3기사\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671년 음력 11월 30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과 조치\"\u003e송시열이 농가의 어려움과 진휼 부정을 지적\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u003e『현종개수실록』 권25 제2기사\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672년 음력 정월\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과 조치\"\u003e대동미 부담 경감과 진휼 방식 논의 지속\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u003e『현종실록』 행장\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A0%84%EC%84%B8%EB%A5%BC-%ED%98%84%EC%A7%80%EC%97%90-%EB%82%A8%EA%B8%B4-%EC%A0%84%ED%99%98%EC%A0%90\" class=\"anchor\" id=\"전세를-현지에-남긴-전환점\"\u003e\u003c/a\u003e전세를 현지에 남긴 전환점\u003c/h2\u003e\n\u003cp\u003e대응의 전환점은 중앙으로 보낼 세곡을 현지 구호에 돌린 조치다. 전세는 토지에 부과하던 세금이다. 곡식으로 거둔 세금을 운송하는 일도 백성에게 부담이었다. 조정은 그 곡식의 사용처를 재난 지역으로 바꾸었다.\u003c/p\u003e\n\u003cp\u003e1671년 음력 정월 조치는 \u003cstrong\u003e여섯 도의 전세\u003c/strong\u003e를 대상으로 했다. 삼남은 충청·전라·경상을 뜻한다. 여기에 당시 원양도와 황해도·경기도가 포함됐다. 행장은 이를 봄철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쓰도록 했다고 전한다.\u003c/p\u003e\n\u003cp\u003e전세의 현지 사용은 세금 전액 면제와 구분해야 한다. 거둔 곡식의 사용처를 바꾸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줄이거나 납부를 미루는 조치는 별도로 시행됐다. 구호 재원 확보와 부담 경감은 서로 다른 정책 수단이었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A%B2%BD%EC%8B%A0%EB%8C%80%EA%B8%B0%EA%B7%BC-%EC%A7%84%ED%9C%BC-%EB%B0%A9%EC%8B%9D%EC%9D%98-%EC%B0%A8%EC%9D%B4\" class=\"anchor\" id=\"경신대기근-진휼-방식의-차이\"\u003e\u003c/a\u003e경신대기근 진휼 방식의 차이\u003c/h2\u003e\n\u003cp\u003e진휼은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는 조치를 뜻한다. 당시에는 죽 지급과 건량 지급, 곡식 판매가 함께 쓰였다. 건량은 죽으로 조리하지 않은 마른 양식이다. 다음 표의 기능 구분은 기록된 지급 방식을 풀이한 것이다.\u003c/p\u003e\n\u003cdiv class=\"overflow-x-auto\"\u003e\u003ctable\u003e\n\u003cthead\u003e\n\u003ctr\u003e\n\u003cth\u003e방식\u003c/th\u003e\n\u003cth\u003e기록에 나타난 형태\u003c/th\u003e\n\u003cth\u003e기능과 구분점\u003c/th\u003e\n\u003c/tr\u003e\n\u003c/thead\u003e\n\u003ctbody\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방식\"\u003e죽 지급\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에 나타난 형태\"\u003e구호 장소에서 죽을 끓여 제공\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능과 구분점\"\u003e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 제공\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방식\"\u003e건량 지급\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에 나타난 형태\"\u003e마른 양식을 나누어 줌\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능과 구분점\"\u003e양식을 받아 따로 소비하는 방식\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방식\"\u003e곡식 판매\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에 나타난 형태\"\u003e관청이 확보한 곡식을 시장에 공급\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능과 구분점\"\u003e구매가 필요하므로 무상 배급과 다름\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방식\"\u003e의복 지급\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에 나타난 형태\"\u003e겨울옷이나 면포 제공\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능과 구분점\"\u003e식량 이외의 생활 필요 지원\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방식\"\u003e부담 경감\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에 나타난 형태\"\u003e세금·공물·노역의 감면 또는 납부 연기\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능과 구분점\"\u003e가구에서 빠져나가는 자원과 노동 부담 완화\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p\u003e행장은 서울의 죽 지급과 사대부의 건량 수령을 구분한다. 따라서 배분 방식에는 신분에 따른 차이도 있었다. 1672년 논의에서는 떠돌며 구걸하는 사람의 구제가 쟁점이었다. 건량 지급만으로 모든 처지에 대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A0%9C%EC%A3%BC-%EC%A7%80%EC%9B%90%EA%B3%BC-%EB%8B%A4%EC%9D%8C-%EB%86%8D%EC%82%AC%EC%9D%98-%EC%9E%AC%EA%B0%9C\" class=\"anchor\" id=\"제주-지원과-다음-농사의-재개\"\u003e\u003c/a\u003e제주 지원과 다음 농사의 재개\u003c/h2\u003e\n\u003cp\u003e제주 지원은 당장의 생활 유지와 파종 지원을 함께 담았다. \u003ca href=\"https://sillok.history.go.kr/id/wrb_11209012_003\"\u003e1671년 음력 9월 12일 기사\u003c/a\u003e에 정치화의 보고가 남아 있다. 보고에는 공물·노역 경감과 면포·보리 종자 지원이 등장한다. 이는 식량 지급을 넘어선 대응이었다.\u003c/p\u003e\n\u003cp\u003e면포는 옷감을 마련하는 데 쓰이는 물자다. 보리 종자는 다음 농사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부담 경감은 가구가 내야 할 물자나 노동을 줄이는 조치였다. 각각 생활 유지와 생산 재개의 다른 부분을 뒷받침했다.\u003c/p\u003e\n\u003cp\u003e다만 지원 결정과 수확 회복은 같은 사실이 아니다. 이 기사는 제주 전체의 회복 정도를 보여주는 통계가 아니다. 종자가 모든 농가에 얼마나 도달했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생산 회복을 지원했다는 범위에서 의미를 읽어야 한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D%92%8D%EB%85%84-%EB%92%A4%EC%97%90%EB%8F%84-%EA%B5%AC%ED%98%B8%EA%B0%80-%EC%9D%B4%EC%96%B4%EC%A7%84-%EC%9D%B4%EC%9C%A0\" class=\"anchor\" id=\"풍년-뒤에도-구호가-이어진-이유\"\u003e\u003c/a\u003e풍년 뒤에도 구호가 이어진 이유\u003c/h2\u003e\n\u003cp\u003e풍년이 들었다는 기록만으로 모든 가구의 회복을 뜻하지는 않는다. 행장은 1671년에 팔도가 풍년이었다고 평가한다. 반면 송시열은 그해 가난한 농가의 경작 중단을 지적했다. 두 기록은 수확 상황과 가구별 생활을 다르게 비춘다.\u003c/p\u003e\n\u003cp\u003e\u003ca href=\"https://sillok.history.go.kr/id/wrb_11211030_002\"\u003e1671년 음력 11월 30일 상소\u003c/a\u003e는 노동력 부족을 원인으로 들었다. 농사를 짓지 못한 가구는 수확의 혜택을 얻기 어려웠다. 송시열은 이런 가구에 구호가 계속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풍년과 굶주림이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u003c/p\u003e\n\u003cp\u003e행장에는 \u003cstrong\u003e1672년 음력 정월\u003c/strong\u003e에도 진휼 논의가 나온다. 같은 달 대동미 부담을 줄이는 조치도 기록됐다. 따라서 사건의 명칭상 기간과 구호의 종료 시점은 다르다. 1671년을 완전한 피해 극복의 해로 단정하기 어렵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A7%80%EC%9B%90-%EA%B2%B0%EC%A0%95%EA%B3%BC-%EC%8B%A4%EC%A0%9C-%EB%8F%84%EB%8B%AC%EC%9D%98-%EC%B0%A8%EC%9D%B4\" class=\"anchor\" id=\"지원-결정과-실제-도달의-차이\"\u003e\u003c/a\u003e지원 결정과 실제 도달의 차이\u003c/h2\u003e\n\u003cp\u003e지원 명령의 존재만으로 구호가 제대로 전달됐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송시열은 일부 현장에서 구호 인원을 부풀렸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담당자들이 남는 쌀을 사적으로 차지했다. 중앙의 늦은 결정도 구호를 지연시킨 문제로 지적됐다.\u003c/p\u003e\n\u003cp\u003e이 상소는 행정의 여러 단계를 나누어 읽게 한다. 조정의 승인과 현장의 배분은 별개의 과정이다. 수령자의 생활 개선은 그 뒤에 확인해야 할 결과다. 아래 구분은 상소를 바탕으로 정리한 해석이다.\u003c/p\u003e\n\u003cdiv class=\"overflow-x-auto\"\u003e\u003ctable\u003e\n\u003cthead\u003e\n\u003ctr\u003e\n\u003cth\u003e확인 단계\u003c/th\u003e\n\u003cth\u003e기록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u003c/th\u003e\n\u003cth\u003e별도로 확인할 내용\u003c/th\u003e\n\u003c/tr\u003e\n\u003c/thead\u003e\n\u003ctbody\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확인 단계\"\u003e정책 결정\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u003e구호를 명령하거나 물자를 배정함\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별도로 확인할 내용\"\u003e실제 집행 시기\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확인 단계\"\u003e현장 배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u003e구호 인원과 지급 상황을 보고함\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별도로 확인할 내용\"\u003e보고의 정확성과 물자 누락\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확인 단계\"\u003e생활 회복\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u003e경작·식량 사정에 대한 평가가 남음\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별도로 확인할 내용\"\u003e지역별·가구별 회복 차이\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p\u003e지급이라는 말도 항상 무상 지원을 뜻하지는 않는다. 행장에는 일부 건량 수령분의 징수 면제 조치가 나온다. 대상은 수령자가 사망하고 토지도 없는 경우였다. 따라서 지급 방식과 상환 조건은 따로 확인해야 한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A%B8%B0%EB%A1%9D%EA%B3%BC-%ED%95%B4%EC%84%9D\" class=\"anchor\" id=\"기록과-해석\"\u003e\u003c/a\u003e기록과 해석\u003c/h2\u003e\n\u003cp\u003e이 사건은 실록의 서술과 후대 연구를 구분해 읽어야 한다. 행장은 왕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하는 글이다. 상소는 신하가 문제를 제기하며 정책을 건의하는 문서다. 두 기록 모두 작성 목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A%B8%B0%EB%A1%9D%EC%9D%B4-%EB%A7%90%ED%95%98%EB%8A%94-%EB%8C%80%EC%9D%91%EA%B3%BC-%EB%B9%84%ED%8C%90\" class=\"anchor\" id=\"기록이-말하는-대응과-비판\"\u003e\u003c/a\u003e기록이 말하는 대응과 비판\u003c/h3\u003e\n\u003cp\u003e행장은 현종의 구호 조치와 성과를 강조한다. 송시열의 상소는 구호의 부정과 지연을 문제 삼는다. 상소의 비판을 전국 모든 현장의 실태로 확대할 수는 없다. 반대로 행장의 긍정적 평가만으로 피해 회복을 확정해서도 안 된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97%B0%EA%B5%AC%EC%97%90%EC%84%9C-%EC%84%A4%EB%AA%85%ED%95%98%EB%8A%94-%EC%82%AC%ED%9A%8C%EC%A0%81-%EC%98%81%ED%96%A5\" class=\"anchor\" id=\"연구에서-설명하는-사회적-영향\"\u003e\u003c/a\u003e연구에서 설명하는 사회적 영향\u003c/h3\u003e\n\u003cp\u003e\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30_0050_0030_0020\u0026amp;whereStr=\"\u003e『신편 한국사』\u003c/a\u003e는 재난을 인구와 군역 문제에 연결한다. 군역은 군 복무나 이를 뒷받침하는 부담을 뜻한다. 대기근은 기존 군역 규모를 유지하기 어려운 배경이 됐다. 이를 계기로 부담 구조를 바꾸자는 논의가 힘을 얻었다는 해석이다.\u003c/p\u003e\n\u003cp\u003e호적 수치에도 행정 목적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 나온다. 군역 대상자를 찾아내는 조사 강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적에 오른 인구와 실제 전체 인구는 구분해야 한다. 해당 연구의 해석을 모든 인구 추정의 합의로 볼 수는 없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82%AC%EB%A7%9D%EC%9E%90-%EC%88%98%EB%8A%94-%EC%96%B4%EB%94%94%EA%B9%8C%EC%A7%80-%ED%99%95%EC%9D%B8%EB%90%98%EB%8A%94%EA%B0%80\" class=\"anchor\" id=\"사망자-수는-어디까지-확인되는가\"\u003e\u003c/a\u003e사망자 수는 어디까지 확인되는가\u003c/h3\u003e\n\u003cp\u003e호적 인구의 감소분을 곧바로 사망자 수로 계산할 수는 없다. \u003ca href=\"https://db.history.go.kr/id/kn_096_0010_0020_0020\"\u003e『국사관논총』의 인구변동 표\u003c/a\u003e는 서로 다른 기록을 나란히 제시한다. 같은 해에도 자료별 등록 인구가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는 그중 『조선왕조실록』 계열 수치다.\u003c/p\u003e\n\u003cdiv class=\"overflow-x-auto\"\u003e\u003ctable\u003e\n\u003cthead\u003e\n\u003ctr\u003e\n\u003cth\u003e구분\u003c/th\u003e\n\u003cth\u003e등록 인구\u003c/th\u003e\n\u003cth\u003e수치의 의미\u003c/th\u003e\n\u003c/tr\u003e\n\u003c/thead\u003e\n\u003ctbody\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구분\"\u003e1669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등록 인구\"\u003e5,164,524명\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수치의 의미\"\u003e비교 시작 시점의 호적 인구\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구분\"\u003e1672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등록 인구\"\u003e4,695,611명\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수치의 의미\"\u003e비교 종료 시점의 호적 인구\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구분\"\u003e1669~1672년 감소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등록 인구\"\u003e468,913명\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수치의 의미\"\u003e등록 인구의 차이이며 사망자 확정치가 아님\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p\u003e이 차이에는 사망 외에 이동과 조사·등록 조건도 개입할 수 있다. 전국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이 표만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실제 인구의 회복 시점도 연구 방법에 따라 검토가 필요하다. 숫자를 인용할 때는 자료명과 비교 연도를 함께 밝혀야 한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98%A4%EB%8A%98%EB%82%A0-%EC%9E%AC%EB%82%9C-%EB%8C%80%EC%9D%91%EC%82%AC%EC%97%90%EC%84%9C%EC%9D%98-%EC%9D%98%EB%AF%B8\" class=\"anchor\" id=\"오늘날-재난-대응사에서의-의미\"\u003e\u003c/a\u003e오늘날 재난 대응사에서의 의미\u003c/h2\u003e\n\u003cp\u003e이 사례는 식량 공급과 생산 회복을 나누어 분석하게 한다. 곡식이 있어도 농사를 재개하지 못한 가구가 있었다. 구호를 결정해도 전달 과정에서 누락과 지연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기록에서 확인되는 서로 다른 문제다.\u003c/p\u003e\n\u003cp\u003e제주 종자 지원은 다음 생산을 위한 조치였다. 전세의 현지 사용은 구호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이었다. 송시열의 비판은 집행 과정의 검증 필요성을 드러낸다. 현대 제도의 직접 기원으로 단정하지 않고 비교할 수 있는 지점들이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9E%90%EC%A3%BC-%EB%AC%BB%EB%8A%94-%EC%A7%88%EB%AC%B8\" class=\"anchor\" id=\"자주-묻는-질문\"\u003e\u003c/a\u003e자주 묻는 질문\u003c/h2\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A%B2%BD%EC%8B%A0%EB%8C%80%EA%B8%B0%EA%B7%BC%EC%9D%80-%EC%96%B8%EC%A0%9C-%EB%B0%9C%EC%83%9D%ED%96%88%EB%8A%94%EA%B0%80\" class=\"anchor\" id=\"경신대기근은-언제-발생했는가\"\u003e\u003c/a\u003e경신대기근은 언제 발생했는가?\u003c/h3\u003e\n\u003cp\u003e현종 11~12년인 1670~1671년에 발생했다. 경술년과 신해년에서 이름을 땄다. 구호는 1672년에도 이어졌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D%94%BC%ED%95%B4%EB%8A%94-%ED%8A%B9%EC%A0%95-%EC%A7%80%EC%97%AD%EC%97%90-%ED%95%9C%EC%A0%95%EB%90%90%EB%8A%94%EA%B0%80\" class=\"anchor\" id=\"피해는-특정-지역에-한정됐는가\"\u003e\u003c/a\u003e피해는 특정 지역에 한정됐는가?\u003c/h3\u003e\n\u003cp\u003e『현종실록』 행장은 팔도에 기근이 들었다고 기록한다. 서울과 지방의 구호가 함께 등장한다. 제주에도 별도의 물자 지원이 이뤄졌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D%98%84%EC%A2%85-%ED%98%BC%EC%9E%90-%EA%B5%AC%ED%98%B8%EB%A5%BC-%EB%8B%B4%EB%8B%B9%ED%96%88%EB%8A%94%EA%B0%80\" class=\"anchor\" id=\"현종-혼자-구호를-담당했는가\"\u003e\u003c/a\u003e현종 혼자 구호를 담당했는가?\u003c/h3\u003e\n\u003cp\u003e국왕의 명령을 여러 기관과 지방 관리가 집행했다. 기록에는 호조·진휼청·한성부 등이 나온다. 실제 성과는 현장의 운영에도 달려 있었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A3%BD-%EC%A7%80%EA%B8%89%EA%B3%BC-%EA%B3%A1%EC%8B%9D-%ED%8C%90%EB%A7%A4%EB%8A%94-%EA%B0%99%EC%9D%80-%EC%A7%84%ED%9C%BC%EC%9D%B8%EA%B0%80\" class=\"anchor\" id=\"죽-지급과-곡식-판매는-같은-진휼인가\"\u003e\u003c/a\u003e죽 지급과 곡식 판매는 같은 진휼인가?\u003c/h3\u003e\n\u003cp\u003e둘 다 식량난 대응에 쓰였지만 공급 방식이 다르다. 죽 지급은 조리한 음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곡식 판매는 구매를 전제로 한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B%B3%B4%EB%A6%AC-%EC%A2%85%EC%9E%90%EB%A5%BC-%EC%A7%80%EA%B8%89%ED%95%9C-%EC%9D%B4%EC%9C%A0%EB%8A%94-%EB%AC%B4%EC%97%87%EC%9D%B8%EA%B0%80\" class=\"anchor\" id=\"보리-종자를-지급한-이유는-무엇인가\"\u003e\u003c/a\u003e보리 종자를 지급한 이유는 무엇인가?\u003c/h3\u003e\n\u003cp\u003e보리 종자는 파종을 돕기 위한 물자였다. 당장의 식량 지원과는 기능이 다르다. 지급 결정만으로 실제 수확 회복까지 확인되지는 않는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1671%EB%85%84-%ED%92%8D%EB%85%84%EC%9D%B4%EB%A9%B4-%EA%B8%B0%EA%B7%BC%EC%9D%B4-%EB%81%9D%EB%82%9C-%EA%B2%83%EC%9D%B8%EA%B0%80\" class=\"anchor\" id=\"1671년-풍년이면-기근이-끝난-것인가\"\u003e\u003c/a\u003e1671년 풍년이면 기근이 끝난 것인가?\u003c/h3\u003e\n\u003cp\u003e풍년 기록만으로 생활 회복을 단정할 수 없다. 송시열은 농사를 짓지 못한 빈민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이듬해에도 진휼과 부담 경감이 이어졌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9D%84%EB%B3%91%EB%8C%80%EA%B8%B0%EA%B7%BC%EA%B3%BC%EB%8A%94-%EC%96%B4%EB%96%BB%EA%B2%8C-%EB%8B%A4%EB%A5%B8%EA%B0%80\" class=\"anchor\" id=\"을병대기근과는-어떻게-다른가\"\u003e\u003c/a\u003e을병대기근과는 어떻게 다른가?\u003c/h3\u003e\n\u003cp\u003e을병대기근은 숙종 때의 별도 재난이다. 『국사관논총』은 1695~1699년을 관련 피해 시기로 다룬다. 두 사건의 인구 감소 수치를 섞어서는 안 된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82%AC%EB%A7%9D%EC%9E%90%EA%B0%80-468913%EB%AA%85%EC%9D%B4%EB%9D%BC%EB%8A%94-%EB%9C%BB%EC%9D%B8%EA%B0%80\" class=\"anchor\" id=\"사망자가-468913명이라는-뜻인가\"\u003e\u003c/a\u003e사망자가 468,913명이라는 뜻인가?\u003c/h3\u003e\n\u003cp\u003e그 수치는 1669~1672년 등록 인구의 감소분이다. 사망자만 집계한 숫자가 아니다. 정확한 사망 규모를 뜻하는 수치로 인용하면 안 된다.\u003c/p\u003e\n","tags":["국가재정","조선시대"],"faqs":[{"question":"경신대기근은 언제 발생했는가?","answer":"현종 11~12년인 1670~1671년에 발생했다. 경술년과 신해년에서 이름을 땄다. 구호는 1672년에도 이어졌다."},{"question":"피해는 특정 지역에 한정됐는가?","answer":"『현종실록』 행장은 팔도에 기근이 들었다고 기록한다. 서울과 지방의 구호가 함께 등장한다. 제주에도 별도의 물자 지원이 이뤄졌다."},{"question":"현종 혼자 구호를 담당했는가?","answer":"국왕의 명령을 여러 기관과 지방 관리가 집행했다. 기록에는 호조·진휼청·한성부 등이 나온다. 실제 성과는 현장의 운영에도 달려 있었다."},{"question":"죽 지급과 곡식 판매는 같은 진휼인가?","answer":"둘 다 식량난 대응에 쓰였지만 공급 방식이 다르다. 죽 지급은 조리한 음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곡식 판매는 구매를 전제로 한다."},{"question":"보리 종자를 지급한 이유는 무엇인가?","answer":"보리 종자는 파종을 돕기 위한 물자였다. 당장의 식량 지원과는 기능이 다르다. 지급 결정만으로 실제 수확 회복까지 확인되지는 않는다."},{"question":"1671년 풍년이면 기근이 끝난 것인가?","answer":"풍년 기록만으로 생활 회복을 단정할 수 없다. 송시열은 농사를 짓지 못한 빈민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이듬해에도 진휼과 부담 경감이 이어졌다."},{"question":"을병대기근과는 어떻게 다른가?","answer":"을병대기근은 숙종 때의 별도 재난이다. 『국사관논총』은 1695~1699년을 관련 피해 시기로 다룬다. 두 사건의 인구 감소 수치를 섞어서는 안 된다."},{"question":"사망자가 468,913명이라는 뜻인가?","answer":"그 수치는 1669~1672년 등록 인구의 감소분이다. 사망자만 집계한 숫자가 아니다. 정확한 사망 규모를 뜻하는 수치로 인용하면 안 된다."}],"sources":[{"url":"https://sillok.history.go.kr/popup/print.do?gubun=kor\u0026id=wra_200001","title":"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 부록 「현종 대왕 행장」","type":"source"},{"url":"https://sillok.history.go.kr/id/wrb_11209012_003","title":"『현종개수실록』 권24, 현종 12년 음력 9월 12일 제3기사, 제주 지원 관련 논의","type":"source"},{"url":"https://sillok.history.go.kr/id/wrb_11211030_002","title":"『현종개수실록』 권25, 현종 12년 음력 11월 30일 제2기사, 송시열 상소","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30_0050_0030_0020\u0026whereStr=","title":"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30권, 「소빙기 자연재해와 인구 동향」","type":"source"},{"url":"https://db.history.go.kr/id/kn_096_0010_0020_0020","title":"『국사관논총』 제96집 「조선후기 질병사 연구」, 「전염병 발생의 영향」 및 17세기 후반 인구변동 표","type":"data_point"}],"images":[{"id":2246,"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Q1MTEsInB1ciI6ImJsb2JfaWQifX0=--5887450054ea996d7a8aeb69c7855c1de3eb9599/ai-9dee31c6.webp","is_representative":true,"generation_method":"ai_infographic","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visible_locales":["ko"],"translations":{"ko":{"alt":"흉년과 전염병, 진휼 방식, 제주 지원, 회복 판단의 주의점을 네 칸으로 정리한 경신대기근 인포그래픽","caption":"풍년 기록만으로 모든 가구의 생활 회복을 단정할 수는 없다.","description":null},"en":{"alt":"Four-panel infographic on crop failure, epidemics, famine relief, Jeju aid and caution in assessing recovery.","caption":"Records of a good harvest alone do not establish that every household had recovered.","description":null},"ja":{"alt":"凶作と疫病、救済方法、済州への支援、回復を判断する際の注意点を4区画にまとめた庚辛大飢饉の図解","caption":"豊作の記録だけで、すべての世帯の暮らしが回復したとは断定できない。","description":null},"es":{"alt":"Infografía en cuatro paneles sobre malas cosechas, epidemias, socorro, ayuda a Jeju y evaluación de la recuperación.","caption":"Los registros de una buena cosecha no bastan para concluir que todos los hogares se habían recuperado.","description":null},"id":{"alt":"Infografik empat panel tentang gagal panen, wabah, bantuan pangan, dukungan untuk Jeju, dan penilaian pemulihan.","caption":"Catatan panen melimpah saja tidak cukup untuk memastikan bahwa kehidupan semua rumah tangga telah pulih.","description":null},"pt":{"alt":"Infográfico em quatro painéis sobre más colheitas, epidemias, socorro, apoio a Jeju e avaliação da recuperação.","caption":"Registros de uma boa colheita não bastam para concluir que todos os lares haviam se recuperado.","description":null},"zh-hant":{"alt":"以四個區塊整理歉收與疫病、賑濟方式、濟州援助及判斷復甦時須注意事項的庚辛大饑荒資訊圖表","caption":"僅憑豐收紀錄，不能斷定所有家戶的生活都已恢復。","description":null},"de":{"alt":"Viergeteilte Infografik zu Missernten, Seuchen, Hungerhilfe, Hilfen für Jeju und der Bewertung der Erholung.","caption":"Aufzeichnungen über eine gute Ernte allein belegen nicht, dass sich alle Haushalte erholt hatten.","description":null}}},{"id":2244,"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Q0OTksInB1ciI6ImJsb2JfaWQifX0=--4a39d5175b90178a2c21e8fedbab07222aef047e/ai-e5761dd1.webp","is_representative":false,"generation_method":"ai_semi","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translations":{"ko":{"alt":"눈 덮인 마당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고, 곡식 창고 옆에서는 큰 가마솥의 죽을 그릇에 담고 있다.","caption":"죽 지급은 경신대기근에 대응한 진휼 방식 중 하나였다.","description":null},"en":{"alt":"Villagers queue in a snowy courtyard as workers ladle porridge beside a grain storehouse.","caption":"During the famine of 1670–1671, porridge distribution was one form of relief.","description":null},"ja":{"alt":"雪の積もる庭で人々が列を作り、穀物倉のそばでは大釜の粥が器によそわれている。","caption":"粥の支給は、1670～1671年の庚辛大飢饉に対応した救済方法の一つだった。","description":null},"es":{"alt":"Aldeanos hacen cola en un patio nevado mientras se sirven gachas junto a un granero.","caption":"El reparto de gachas fue una de las medidas de socorro durante la hambruna de 1670–1671.","description":null},"id":{"alt":"Warga mengantre di halaman bersalju saat petugas menyendok bubur di samping lumbung.","caption":"Pembagian bubur merupakan salah satu bentuk bantuan selama kelaparan 1670–1671.","description":null},"pt":{"alt":"Moradores fazem fila num pátio nevado enquanto trabalhadores servem papa ao lado de um celeiro.","caption":"A distribuição de papa foi uma das formas de socorro durante a fome de 1670–1671.","description":null},"zh-hant":{"alt":"村民在積雪的院落中排隊，穀倉旁的工作人員將大鍋裡的粥舀入碗中。","caption":"施粥是1670至1671年庚辛大饑荒期間的賑濟方式之一。","description":null},"de":{"alt":"In einem verschneiten Hof warten Dorfbewohner auf Brei, der neben einem Kornspeicher ausgegeben wird.","caption":"Die Ausgabe von Brei war eine der Hilfsmaßnahmen während der Hungersnot von 1670–1671.","description":null}}},{"id":2245,"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Q1MDUsInB1ciI6ImJsb2JfaWQifX0=--10134b290d8d51bc24536fcf6d4c58ad6a96a1e4/ai-59459ea6.webp","is_representative":false,"generation_method":"ai_semi","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translations":{"ko":{"alt":"제주 해안의 돌담과 초가 사이에서 주민들이 곡식을 나누고, 앞에는 곡식 자루와 접힌 천이 쌓여 있다.","caption":"제주에 대한 지원은 생계 유지와 다음 농사의 재개를 함께 겨냥했다.","description":null},"en":{"alt":"Villagers sort grain beside sacks and folded cloth in a stone-walled coastal courtyard on Jeju.","caption":"Relief for Jeju aimed both to sustain livelihoods and to help farming resume.","description":null},"ja":{"alt":"済州の海沿いにある石垣と茅葺き家屋に囲まれた庭で、住民が穀物を分け、手前には穀物袋と畳んだ布が並ぶ。","caption":"済州への支援は、暮らしの維持と次の作付けの再開をともに目指した。","description":null},"es":{"alt":"Aldeanos separan grano junto a sacos y telas dobladas en un patio con muros de piedra en la costa de Jeju.","caption":"La ayuda a Jeju buscaba sostener la subsistencia y facilitar la reanudación de las labores agrícolas.","description":null},"id":{"alt":"Warga memilah biji-bijian di dekat karung dan lipatan kain di halaman berdinding batu di pesisir Jeju.","caption":"Bantuan untuk Jeju bertujuan menopang penghidupan sekaligus membantu dimulainya kembali kegiatan pertanian.","description":null},"pt":{"alt":"Moradores separam grãos junto a sacos e tecidos dobrados num pátio cercado por muros de pedra no litoral de Jeju.","caption":"A ajuda a Jeju visava sustentar a subsistência e permitir a retomada das atividades agrícolas.","description":null},"zh-hant":{"alt":"濟州海邊的石牆與茅屋之間，村民正在分裝穀物，前方堆放著穀物袋與摺好的布匹。","caption":"對濟州的援助兼顧維持生計與恢復下一季耕作。","description":null},"de":{"alt":"Dorfbewohner sortieren Korn neben Säcken und gefalteten Stoffen in einem Hof mit Steinmauern an Jejus Küste.","caption":"Die Hilfe für Jeju sollte den Lebensunterhalt sichern und die Wiederaufnahme des Ackerbaus ermöglichen.","description":null}}}],"published_at":"2026-10-29T18:21:43+09:00","updated_at":"2026-10-29T18:21:43+09:00","license":"cc_by","translation_status":"original","available_locales":["ko","en","ja","es"],"data_locales":["ko","en","ja","es","id","pt","zh-hant","de"],"url":"https://injoys.com/ko/articles/gyeongsin-famine-1670-1671-relief-and-recov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