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_id":"epyytykkfp","slug":"june-10-movement-1926-student-preparation-and-significance","locale":"ko","schema_type":"Article","category":"knowledge_base","category_name":"지식 베이스","title":"6·10만세운동 1926년 학생 시위의 준비와 의미","summary":"6·10만세운동은 1926년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실행된 항일운동이다. 준비 세력의 연대와 차이, 사전 검거 뒤 학생들의 격문 제작, 시위와 재판을 나누어 볼 수 있다.","sponsorship_disclosure":null,"affiliate_disclosure":null,"commerce_disclosure":null,"author":{"name":"인조이스 편집팀","url":"https://injoys.com/ko/about"},"key_points":["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에 실행되었다.","노총계와 학생 중심의 사직동계·통동계는 역할과 준비 기반이 달랐다.","학생들은 사전 검거 뒤에도 학교 간 연락과 격문 제작을 이어갔다.","「대한독립당 격고문」은 대중적으로 배포되지 못한 사전 준비 문서다.","6·10만세운동은 탄압으로 제약되었지만 학생들의 조직 역량을 드러냈다."],"content_markdown":"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학생들이 실행한 항일시위다. 사전 검거와 감시 속에서도 학교 간 연락과 격문 배포로 시위를 이어갔다. 조직적인 학생 항일운동의 역량을 보여 준 사건으로 기억된다.\n\n이 글은 우리역사넷의 사료·해설을 따르며 2026년 11월에 확인했다.\n\n## 순종의 장례일이 거사일이 된 배경\n\n순종의 장례일은 학생과 군중이 같은 장소에 모이는 계기였다. 인산일은 왕이나 황제의 장례를 치르는 날을 뜻한다. 순종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항의가 겹쳐 있었다.\n\n식민 당국은 3·1운동과 같은 시위의 재현을 경계했다. 애도 집회는 통제 대상이었고 주요 인물과 단체는 감시 대상이었다. 준비 세력은 이런 제약 속에서 공개 집회 대신 비밀 연락을 활용했다. 배경은 [『신편 한국사』의 운동 태동 해설](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10)에 서술되어 있다.\n\n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학교 사이의 연결 기반이었다. 이 단체는 사회과학 연구와 학생들의 단결을 추진했다. 단순한 자연과학 동아리로 이해하면 당시 활동을 놓치게 된다. 단체의 성격은 [우리역사넷 교과서 용어 해설](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ganada=\u0026levelId=tg_004_2010\u0026pageUnit=10\u0026treeId=0106)에서 확인된다.\n\n## 준비부터 재판까지의 연표\n\n준비는 순종의 장례 이전에 시작되었고 재판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아래 연표는 주요 전환점을 날짜별로 구분한 것이다. 출처의 절 제목은 각 사건을 확인할 위치를 가리킨다.\n\n| 시기 | 주요 사건 | 출처 |\n| --- | --- | --- |\n| 1926년 4월 | 순종의 죽음 뒤 애도와 항일 분위기 확산 | 『신편 한국사』 「융희황제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 |\n| 1926년 5월 20일 | 박하균의 하숙집에서 학생 대표들이 거사 준비 협의 | 『신편 한국사』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 |\n| 1926년 6월 초 | 권오설 등과 연결된 준비 계획 발각과 검거 | 『신편 한국사』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 |\n| 1926년 6월 8일과 9일 | 학생들의 격문 제작·전달과 지방 학교 발송 | 『신편 한국사』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 |\n| 1926년 6월 10일 | 순종의 장례 행렬 주변에서 만세시위 실행 | 『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n| 1926년 6월 25일 | 학생 관련 피고인 11명 기소 | 『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n| 1926년 11월 2일 |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 개정 | 『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n| 1927년 3월 25일 | 2심에서 10명에게 징역 1년의 실형 선고 | 『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n\n## 노총계·사직동계·통동계의 차이\n\n세 계열은 구별되지만 서로 완전히 단절된 집단은 아니었다. 학생 쪽에도 전문학교와 중등학교를 잇는 연결이 있었다. 따라서 계열명은 준비 기반을 구분하는 명칭으로 이해해야 한다.\n\n| 구분 | 중심 인물과 기반 | 준비의 특징 | 거사 직전 상황 |\n| --- | --- | --- | --- |\n| 노총계 | 권오설 등 사회주의 계열 인사 | 천도교 일부 세력과 연대하여 인쇄·전국 연락망 준비 | 계획 발각과 검거로 큰 타격 |\n| 사직동계 | 이병립·이선호·박하균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기반 | 전문학교·고등보통학교 학생 연결과 격문 준비 | 사전 검거 뒤 자체 인쇄와 전달 추진 |\n| 통동계 | 박용규·이동환·곽대형 등, 중앙고보·중동학교 학생 중심 | 별도 모임에서 격문 제작과 동료 포섭 | 자체 준비를 이어가며 다른 학생 계열과 연락 |\n\n권오설은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와 연결된 준비의 중심 인물이었다. 천도교 쪽은 인쇄와 지방 조직 활용에 참여했다. 이를 노동자만의 계획으로 축소하면 실제 연대 관계가 사라진다. 이 관계는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30)에 설명되어 있다.\n\n학생 계열도 준비 과정에서 서로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이선호와 통동계 학생들 사이에 연락이 이루어졌다. 비밀 유지와 남은 시간을 고려해 준비 조직은 합치지 않았다. 이 점은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40)에 근거한다.\n\n## 사전 검거 뒤 격문을 마련한 과정\n\n핵심 전환점은 사전 검거 뒤 학생들이 자체 준비를 이어간 데 있다. 격문은 운동의 주장과 참여 요청을 담은 글이다. 학생들은 하숙방과 학교별 인맥을 제작·전달의 거점으로 활용했다.\n\n『신편 한국사』는 학생들의 자체 인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김낙환은 인쇄기를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김규봉은 종이를 구했고 학생들은 이석훈의 집에서 인쇄했다. 사직동계의 인쇄량은 1926년 6월 9일까지 1만여 장으로 서술된다.\n\n통동계도 별도의 격문을 준비했다. 전달 대상에는 서울의 학교와 지방 학교가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직접 전달하고 지방에는 우편을 활용했다. 이 과정은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40)에 기록되어 있다.\n\n- 하숙방은 회의와 인쇄를 진행하는 장소였다.\n- 학교별 연락망은 격문을 동료 학생에게 전달하는 통로였다.\n- 지방 학교로 보낸 우편은 서울 밖으로 참여 요청을 전하는 수단이었다.\n\n이런 준비가 모든 위험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강화된 경계 속에서 시위를 실행했다. 이후 검거가 이어졌다는 점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n\n## 종로에서 이어진 시위와 그 결과\n\n서울의 시위는 종로3가에서 시작해 여러 지점으로 이어졌다.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30분경 이선호가 만세를 선창했다. 중앙고보 학생들은 단성사 앞에서 격문을 뿌렸다.\n\n| 1926년 6월 10일 시각 | 장소 | 전개 |\n| --- | --- | --- |\n| 오전 8시 30분경 | 종로3가 단성사 앞 | 중앙고보 학생들의 만세와 격문 배포 |\n| 오전 8시 45분경 | 관수교 부근 | 연희전문 학생들의 시위와 군중의 호응 |\n| 오전 9시 30분경 |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 | 학생들의 만세와 격문 배포 |\n| 오후 | 훈련원·동대문·신설동·동묘 부근 | 여러 지점에서 시위 지속 |\n\n군경의 진압으로 시위의 확대는 제약되었다. 독립이라는 목표도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형사처벌 외에 무기정학 등 학업상의 불이익을 겪었다.\n\n학생 관련 재판에서는 **11명**이 기소되었다. 1927년 3월 25일 2심에서 10명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유면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전개와 처벌은 [「6·10학생운동의 전개」](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40_0060_0040_0030)를 따른다.\n\n지방의 반응은 서울과 같은 형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창과 인천 등에서는 만세시위가 확인된다. 학교의 애도 금지에 항의하는 동맹휴학도 나타났다. 지역별 양상은 [「지방의 움직임과 만세시위」](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50_0020)에 정리되어 있다.\n\n## 기록과 해석\n\n기록이 직접 보여 주는 사실과 후대의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 특히 격문은 작성 목적과 실제 배포 여부가 다를 수 있다. 학생들의 독자적 실행도 앞선 연대 관계와 함께 읽어야 한다.\n\n### 대한독립당 격고문이 보여 주는 사실\n\n「대한독립당 격고문」은 거사 전에 준비된 문서다. 우리역사넷 「6·10 만세 운동 격문」에 수록되어 있다. 출전은 『재등실문서』 10의 198~201쪽이다.\n\n보존된 형태는 일본어 역문이다. 문서는 독립 요구와 공동투쟁의 지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격고문은 대중적으로 배포되지 못했다. 문서의 성격은 [우리역사넷 사료 해설](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124_0030)에서 확인된다.\n\n따라서 이를 현장에서 배포된 모든 학생 격문과 동일시할 수 없다. 사전 준비 세력의 목표를 보여 주는 자료로 읽어야 한다. 현장 배포의 경로는 학생들의 별도 격문 기록으로 확인해야 한다.\n\n### 연구에서 강조하는 의미\n\n연구와 해설은 학생들의 조직 역량과 세력 간 협력을 강조한다. 학생들은 앞서 쌓인 단체 활동을 시위 준비에 활용했다.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도 독립을 위해 협력했다.\n\n『한국사론』의 연구 검토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복합적 성격을 소개한다. 학생들의 사회주의 연구에는 민족문제 해결의 목적도 있었다. 하나의 이념만으로 모든 참여자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 논의는 [「일제하 청년운동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https://db.history.go.kr/id/hn_026_0060_0020_0020)에 정리되어 있다.\n\n###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n\n격문의 인쇄량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통동계에 관한 박용규의 회고는 3만 장을 제시한다. 『신편 한국사』가 대조한 판결문에는 약 5,000장으로 나온다.\n\n이처럼 차이가 있으므로 어느 기록의 숫자인지 밝혀야 한다. 회고의 숫자를 판결문의 숫자로 바꾸어 인용해서는 안 된다. 실제 배포량도 인쇄량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수치 차이는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의 주석](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40)에 명시되어 있다.\n\n## 인쇄량과 참가자 수를 구분하는 법\n\n운동의 규모를 설명하는 숫자는 집계 대상을 함께 밝혀야 한다. 인쇄한 종이의 수와 글을 읽은 사람의 수는 다르다. 장례에 참여한 인원도 실제 시위 인원과 같은 집계가 아니다.\n\n| 기록의 숫자나 구분 |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 | 피해야 할 해석 |\n| --- | --- | --- |\n| 1926년 6월 10일 학생 2만 4,000여 명 | 장례 행렬 주변에 도열한 학생 | 모두가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단정 |\n| 1926년 6월 25일 기소된 11명 | 학생 관련 재판의 기소 인원 | 전체 준비자나 체포자가 11명이었다는 설명 |\n| 격문 인쇄량 | 제작된 인쇄물의 수 | 같은 수의 사람이 받아 읽었다는 계산 |\n| 격고문의 보존 | 문서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 그 문서가 현장에서 널리 배포되었다는 추정 |\n\n앞의 두 숫자는 [「6·10학생운동의 전개」](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40_0060_0040_0030)에 나온다. 여기서의 구분은 기록의 집계 범위를 비교한 설명이다. 자료를 인용할 때에는 숫자와 함께 날짜·대상·행위를 붙여야 한다.\n\n## 학생운동사에서 오늘도 배우는 이유\n\n6·10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시위를 조직한 방식을 보여 준다. 참여 의사를 모으는 일과 현장에서 실행하는 일은 구별된다. 하숙방의 회의와 인쇄·전달 기록은 그 사이의 과정을 드러낸다.\n\n역사적 위치는 다음처럼 나누어 볼 수 있다.\n\n- 3·1운동 이후 축적된 학생 단체 활동이 집단 시위로 이어졌다.\n-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일부 세력의 협력은 민족협동전선의 경험이었다.\n- 검거 뒤에도 학생운동 조직의 활동은 이어졌다.\n\n6·10만세운동의 연대 경험은 신간회 성립의 배경으로 이해된다. 다만 신간회 창립에는 자치론에 대한 반대도 작용했다. 정우회선언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참여 배경이었다. 이를 구분하는 근거는 [『신편 한국사』 「창립 배경」](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20_0010)에 있다.\n\n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이후 학교별 독서회 조직에도 관여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서울 시위와 확산에 참여했다. 이런 조직 활동은 두 사건 사이의 연결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관련 내용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해설](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ganada=\u0026levelId=tg_004_2010\u0026pageUnit=10\u0026treeId=0106)에 설명되어 있다.","content_html":"\u003cp\u003e6·10만세운동은 \u003cstrong\u003e1926년 6월 10일\u003c/strong\u003e 학생들이 실행한 항일시위다. 사전 검거와 감시 속에서도 학교 간 연락과 격문 배포로 시위를 이어갔다. 조직적인 학생 항일운동의 역량을 보여 준 사건으로 기억된다.\u003c/p\u003e\n\u003cp\u003e이 글은 우리역사넷의 사료·해설을 따르며 2026년 11월에 확인했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88%9C%EC%A2%85%EC%9D%98-%EC%9E%A5%EB%A1%80%EC%9D%BC%EC%9D%B4-%EA%B1%B0%EC%82%AC%EC%9D%BC%EC%9D%B4-%EB%90%9C-%EB%B0%B0%EA%B2%BD\" class=\"anchor\" id=\"순종의-장례일이-거사일이-된-배경\"\u003e\u003c/a\u003e순종의 장례일이 거사일이 된 배경\u003c/h2\u003e\n\u003cp\u003e순종의 장례일은 학생과 군중이 같은 장소에 모이는 계기였다. 인산일은 왕이나 황제의 장례를 치르는 날을 뜻한다. 순종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항의가 겹쳐 있었다.\u003c/p\u003e\n\u003cp\u003e식민 당국은 3·1운동과 같은 시위의 재현을 경계했다. 애도 집회는 통제 대상이었고 주요 인물과 단체는 감시 대상이었다. 준비 세력은 이런 제약 속에서 공개 집회 대신 비밀 연락을 활용했다. 배경은 \u003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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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u003c/th\u003e\n\u003cth\u003e출처\u003c/th\u003e\n\u003c/tr\u003e\n\u003c/thead\u003e\n\u003ctbody\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926년 4월\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주요 사건\"\u003e순종의 죽음 뒤 애도와 항일 분위기 확산\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신편 한국사』 「융희황제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926년 5월 20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주요 사건\"\u003e박하균의 하숙집에서 학생 대표들이 거사 준비 협의\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신편 한국사』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926년 6월 초\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주요 사건\"\u003e권오설 등과 연결된 준비 계획 발각과 검거\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신편 한국사』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926년 6월 8일과 9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주요 사건\"\u003e학생들의 격문 제작·전달과 지방 학교 발송\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신편 한국사』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926년 6월 10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주요 사건\"\u003e순종의 장례 행렬 주변에서 만세시위 실행\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926년 6월 25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주요 사건\"\u003e학생 관련 피고인 11명 기소\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926년 11월 2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주요 사건\"\u003e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 개정\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1927년 3월 25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주요 사건\"\u003e2심에서 10명에게 징역 1년의 실형 선고\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B%85%B8%EC%B4%9D%EA%B3%84%EC%82%AC%EC%A7%81%EB%8F%99%EA%B3%84%ED%86%B5%EB%8F%99%EA%B3%84%EC%9D%98-%EC%B0%A8%EC%9D%B4\" class=\"anchor\" id=\"노총계사직동계통동계의-차이\"\u003e\u003c/a\u003e노총계·사직동계·통동계의 차이\u003c/h2\u003e\n\u003cp\u003e세 계열은 구별되지만 서로 완전히 단절된 집단은 아니었다. 학생 쪽에도 전문학교와 중등학교를 잇는 연결이 있었다. 따라서 계열명은 준비 기반을 구분하는 명칭으로 이해해야 한다.\u003c/p\u003e\n\u003cdiv class=\"overflow-x-auto\"\u003e\u003ctable\u003e\n\u003cthead\u003e\n\u003ctr\u003e\n\u003cth\u003e구분\u003c/th\u003e\n\u003cth\u003e중심 인물과 기반\u003c/th\u003e\n\u003cth\u003e준비의 특징\u003c/th\u003e\n\u003cth\u003e거사 직전 상황\u003c/th\u003e\n\u003c/tr\u003e\n\u003c/thead\u003e\n\u003ctbody\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구분\"\u003e노총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중심 인물과 기반\"\u003e권오설 등 사회주의 계열 인사\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준비의 특징\"\u003e천도교 일부 세력과 연대하여 인쇄·전국 연락망 준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거사 직전 상황\"\u003e계획 발각과 검거로 큰 타격\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구분\"\u003e사직동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중심 인물과 기반\"\u003e이병립·이선호·박하균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기반\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준비의 특징\"\u003e전문학교·고등보통학교 학생 연결과 격문 준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거사 직전 상황\"\u003e사전 검거 뒤 자체 인쇄와 전달 추진\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구분\"\u003e통동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중심 인물과 기반\"\u003e박용규·이동환·곽대형 등, 중앙고보·중동학교 학생 중심\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준비의 특징\"\u003e별도 모임에서 격문 제작과 동료 포섭\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거사 직전 상황\"\u003e자체 준비를 이어가며 다른 학생 계열과 연락\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p\u003e권오설은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와 연결된 준비의 중심 인물이었다. 천도교 쪽은 인쇄와 지방 조직 활용에 참여했다. 이를 노동자만의 계획으로 축소하면 실제 연대 관계가 사라진다. 이 관계는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30\"\u003e「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u003c/a\u003e에 설명되어 있다.\u003c/p\u003e\n\u003cp\u003e학생 계열도 준비 과정에서 서로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이선호와 통동계 학생들 사이에 연락이 이루어졌다. 비밀 유지와 남은 시간을 고려해 준비 조직은 합치지 않았다. 이 점은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40\"\u003e「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u003c/a\u003e에 근거한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82%AC%EC%A0%84-%EA%B2%80%EA%B1%B0-%EB%92%A4-%EA%B2%A9%EB%AC%B8%EC%9D%84-%EB%A7%88%EB%A0%A8%ED%95%9C-%EA%B3%BC%EC%A0%95\" class=\"anchor\" id=\"사전-검거-뒤-격문을-마련한-과정\"\u003e\u003c/a\u003e사전 검거 뒤 격문을 마련한 과정\u003c/h2\u003e\n\u003cp\u003e핵심 전환점은 사전 검거 뒤 학생들이 자체 준비를 이어간 데 있다. 격문은 운동의 주장과 참여 요청을 담은 글이다. 학생들은 하숙방과 학교별 인맥을 제작·전달의 거점으로 활용했다.\u003c/p\u003e\n\u003cp\u003e『신편 한국사』는 학생들의 자체 인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김낙환은 인쇄기를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김규봉은 종이를 구했고 학생들은 이석훈의 집에서 인쇄했다. 사직동계의 인쇄량은 1926년 6월 9일까지 1만여 장으로 서술된다.\u003c/p\u003e\n\u003cp\u003e통동계도 별도의 격문을 준비했다. 전달 대상에는 서울의 학교와 지방 학교가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직접 전달하고 지방에는 우편을 활용했다. 이 과정은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40\"\u003e「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u003c/a\u003e에 기록되어 있다.\u003c/p\u003e\n\u003cul\u003e\n\u003cli\u003e하숙방은 회의와 인쇄를 진행하는 장소였다.\u003c/li\u003e\n\u003cli\u003e학교별 연락망은 격문을 동료 학생에게 전달하는 통로였다.\u003c/li\u003e\n\u003cli\u003e지방 학교로 보낸 우편은 서울 밖으로 참여 요청을 전하는 수단이었다.\u003c/li\u003e\n\u003c/ul\u003e\n\u003cp\u003e이런 준비가 모든 위험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강화된 경계 속에서 시위를 실행했다. 이후 검거가 이어졌다는 점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A2%85%EB%A1%9C%EC%97%90%EC%84%9C-%EC%9D%B4%EC%96%B4%EC%A7%84-%EC%8B%9C%EC%9C%84%EC%99%80-%EA%B7%B8-%EA%B2%B0%EA%B3%BC\" class=\"anchor\" id=\"종로에서-이어진-시위와-그-결과\"\u003e\u003c/a\u003e종로에서 이어진 시위와 그 결과\u003c/h2\u003e\n\u003cp\u003e서울의 시위는 종로3가에서 시작해 여러 지점으로 이어졌다.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30분경 이선호가 만세를 선창했다. 중앙고보 학생들은 단성사 앞에서 격문을 뿌렸다.\u003c/p\u003e\n\u003cdiv class=\"overflow-x-auto\"\u003e\u003ctable\u003e\n\u003cthead\u003e\n\u003ctr\u003e\n\u003cth\u003e1926년 6월 10일 시각\u003c/th\u003e\n\u003cth\u003e장소\u003c/th\u003e\n\u003cth\u003e전개\u003c/th\u003e\n\u003c/tr\u003e\n\u003c/thead\u003e\n\u003ctbody\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1926년 6월 10일 시각\"\u003e오전 8시 30분경\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장소\"\u003e종로3가 단성사 앞\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전개\"\u003e중앙고보 학생들의 만세와 격문 배포\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1926년 6월 10일 시각\"\u003e오전 8시 45분경\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장소\"\u003e관수교 부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전개\"\u003e연희전문 학생들의 시위와 군중의 호응\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1926년 6월 10일 시각\"\u003e오전 9시 30분경\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장소\"\u003e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전개\"\u003e학생들의 만세와 격문 배포\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1926년 6월 10일 시각\"\u003e오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장소\"\u003e훈련원·동대문·신설동·동묘 부근\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전개\"\u003e여러 지점에서 시위 지속\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p\u003e군경의 진압으로 시위의 확대는 제약되었다. 독립이라는 목표도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형사처벌 외에 무기정학 등 학업상의 불이익을 겪었다.\u003c/p\u003e\n\u003cp\u003e학생 관련 재판에서는 \u003cstrong\u003e11명\u003c/strong\u003e이 기소되었다. 1927년 3월 25일 2심에서 10명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유면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전개와 처벌은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40_0060_0040_0030\"\u003e「6·10학생운동의 전개」\u003c/a\u003e를 따른다.\u003c/p\u003e\n\u003cp\u003e지방의 반응은 서울과 같은 형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창과 인천 등에서는 만세시위가 확인된다. 학교의 애도 금지에 항의하는 동맹휴학도 나타났다. 지역별 양상은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50_0020\"\u003e「지방의 움직임과 만세시위」\u003c/a\u003e에 정리되어 있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A%B8%B0%EB%A1%9D%EA%B3%BC-%ED%95%B4%EC%84%9D\" class=\"anchor\" id=\"기록과-해석\"\u003e\u003c/a\u003e기록과 해석\u003c/h2\u003e\n\u003cp\u003e기록이 직접 보여 주는 사실과 후대의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 특히 격문은 작성 목적과 실제 배포 여부가 다를 수 있다. 학생들의 독자적 실행도 앞선 연대 관계와 함께 읽어야 한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B%8C%80%ED%95%9C%EB%8F%85%EB%A6%BD%EB%8B%B9-%EA%B2%A9%EA%B3%A0%EB%AC%B8%EC%9D%B4-%EB%B3%B4%EC%97%AC-%EC%A3%BC%EB%8A%94-%EC%82%AC%EC%8B%A4\" class=\"anchor\" id=\"대한독립당-격고문이-보여-주는-사실\"\u003e\u003c/a\u003e대한독립당 격고문이 보여 주는 사실\u003c/h3\u003e\n\u003cp\u003e「대한독립당 격고문」은 거사 전에 준비된 문서다. 우리역사넷 「6·10 만세 운동 격문」에 수록되어 있다. 출전은 『재등실문서』 10의 198~201쪽이다.\u003c/p\u003e\n\u003cp\u003e보존된 형태는 일본어 역문이다. 문서는 독립 요구와 공동투쟁의 지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격고문은 대중적으로 배포되지 못했다. 문서의 성격은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124_0030\"\u003e우리역사넷 사료 해설\u003c/a\u003e에서 확인된다.\u003c/p\u003e\n\u003cp\u003e따라서 이를 현장에서 배포된 모든 학생 격문과 동일시할 수 없다. 사전 준비 세력의 목표를 보여 주는 자료로 읽어야 한다. 현장 배포의 경로는 학생들의 별도 격문 기록으로 확인해야 한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97%B0%EA%B5%AC%EC%97%90%EC%84%9C-%EA%B0%95%EC%A1%B0%ED%95%98%EB%8A%94-%EC%9D%98%EB%AF%B8\" class=\"anchor\" id=\"연구에서-강조하는-의미\"\u003e\u003c/a\u003e연구에서 강조하는 의미\u003c/h3\u003e\n\u003cp\u003e연구와 해설은 학생들의 조직 역량과 세력 간 협력을 강조한다. 학생들은 앞서 쌓인 단체 활동을 시위 준비에 활용했다.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도 독립을 위해 협력했다.\u003c/p\u003e\n\u003cp\u003e『한국사론』의 연구 검토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복합적 성격을 소개한다. 학생들의 사회주의 연구에는 민족문제 해결의 목적도 있었다. 하나의 이념만으로 모든 참여자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 논의는 \u003ca href=\"https://db.history.go.kr/id/hn_026_0060_0020_0020\"\u003e「일제하 청년운동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u003c/a\u003e에 정리되어 있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A%B8%B0%EB%A1%9D%EC%9D%B4-%EC%97%87%EA%B0%88%EB%A6%AC%EB%8A%94-%EB%B6%80%EB%B6%84\" class=\"anchor\" id=\"기록이-엇갈리는-부분\"\u003e\u003c/a\u003e기록이 엇갈리는 부분\u003c/h3\u003e\n\u003cp\u003e격문의 인쇄량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통동계에 관한 박용규의 회고는 3만 장을 제시한다. 『신편 한국사』가 대조한 판결문에는 약 5,000장으로 나온다.\u003c/p\u003e\n\u003cp\u003e이처럼 차이가 있으므로 어느 기록의 숫자인지 밝혀야 한다. 회고의 숫자를 판결문의 숫자로 바꾸어 인용해서는 안 된다. 실제 배포량도 인쇄량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수치 차이는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40\"\u003e「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의 주석\u003c/a\u003e에 명시되어 있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9D%B8%EC%87%84%EB%9F%89%EA%B3%BC-%EC%B0%B8%EA%B0%80%EC%9E%90-%EC%88%98%EB%A5%BC-%EA%B5%AC%EB%B6%84%ED%95%98%EB%8A%94-%EB%B2%95\" class=\"anchor\" id=\"인쇄량과-참가자-수를-구분하는-법\"\u003e\u003c/a\u003e인쇄량과 참가자 수를 구분하는 법\u003c/h2\u003e\n\u003cp\u003e운동의 규모를 설명하는 숫자는 집계 대상을 함께 밝혀야 한다. 인쇄한 종이의 수와 글을 읽은 사람의 수는 다르다. 장례에 참여한 인원도 실제 시위 인원과 같은 집계가 아니다.\u003c/p\u003e\n\u003cdiv class=\"overflow-x-auto\"\u003e\u003ctable\u003e\n\u003cthead\u003e\n\u003ctr\u003e\n\u003cth\u003e기록의 숫자나 구분\u003c/th\u003e\n\u003cth\u003e실제로 가리키는 대상\u003c/th\u003e\n\u003cth\u003e피해야 할 해석\u003c/th\u003e\n\u003c/tr\u003e\n\u003c/thead\u003e\n\u003ctbody\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의 숫자나 구분\"\u003e1926년 6월 10일 학생 2만 4,000여 명\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실제로 가리키는 대상\"\u003e장례 행렬 주변에 도열한 학생\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피해야 할 해석\"\u003e모두가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단정\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의 숫자나 구분\"\u003e1926년 6월 25일 기소된 11명\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실제로 가리키는 대상\"\u003e학생 관련 재판의 기소 인원\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피해야 할 해석\"\u003e전체 준비자나 체포자가 11명이었다는 설명\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의 숫자나 구분\"\u003e격문 인쇄량\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실제로 가리키는 대상\"\u003e제작된 인쇄물의 수\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피해야 할 해석\"\u003e같은 수의 사람이 받아 읽었다는 계산\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기록의 숫자나 구분\"\u003e격고문의 보존\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실제로 가리키는 대상\"\u003e문서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피해야 할 해석\"\u003e그 문서가 현장에서 널리 배포되었다는 추정\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p\u003e앞의 두 숫자는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40_0060_0040_0030\"\u003e「6·10학생운동의 전개」\u003c/a\u003e에 나온다. 여기서의 구분은 기록의 집계 범위를 비교한 설명이다. 자료를 인용할 때에는 숫자와 함께 날짜·대상·행위를 붙여야 한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D%95%99%EC%83%9D%EC%9A%B4%EB%8F%99%EC%82%AC%EC%97%90%EC%84%9C-%EC%98%A4%EB%8A%98%EB%8F%84-%EB%B0%B0%EC%9A%B0%EB%8A%94-%EC%9D%B4%EC%9C%A0\" class=\"anchor\" id=\"학생운동사에서-오늘도-배우는-이유\"\u003e\u003c/a\u003e학생운동사에서 오늘도 배우는 이유\u003c/h2\u003e\n\u003cp\u003e6·10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시위를 조직한 방식을 보여 준다. 참여 의사를 모으는 일과 현장에서 실행하는 일은 구별된다. 하숙방의 회의와 인쇄·전달 기록은 그 사이의 과정을 드러낸다.\u003c/p\u003e\n\u003cp\u003e역사적 위치는 다음처럼 나누어 볼 수 있다.\u003c/p\u003e\n\u003cul\u003e\n\u003cli\u003e3·1운동 이후 축적된 학생 단체 활동이 집단 시위로 이어졌다.\u003c/li\u003e\n\u003cli\u003e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일부 세력의 협력은 민족협동전선의 경험이었다.\u003c/li\u003e\n\u003cli\u003e검거 뒤에도 학생운동 조직의 활동은 이어졌다.\u003c/li\u003e\n\u003c/ul\u003e\n\u003cp\u003e6·10만세운동의 연대 경험은 신간회 성립의 배경으로 이해된다. 다만 신간회 창립에는 자치론에 대한 반대도 작용했다. 정우회선언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참여 배경이었다. 이를 구분하는 근거는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20_0010\"\u003e『신편 한국사』 「창립 배경」\u003c/a\u003e에 있다.\u003c/p\u003e\n\u003cp\u003e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이후 학교별 독서회 조직에도 관여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서울 시위와 확산에 참여했다. 이런 조직 활동은 두 사건 사이의 연결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관련 내용은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ganada=\u0026amp;levelId=tg_004_2010\u0026amp;pageUnit=10\u0026amp;treeId=0106\"\u003e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해설\u003c/a\u003e에 설명되어 있다.\u003c/p\u003e\n","tags":["독립운동","한국근현대사"],"faqs":[{"question":"6·10만세운동은 언제 일어났는가?","answer":"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에 일어났다. 서울의 장례 행렬 주변에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렸다."},{"question":"왜 순종의 장례일을 거사일로 정했는가?","answer":"장례는 학생과 군중이 한곳에 모이는 계기였다. 순종에 대한 애도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항의와 연결되었다. 준비 세력은 장례 행렬 주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려 했다."},{"question":"노총계·사직동계·통동계는 하나의 조직이었는가?","answer":"하나로 통합된 조직으로 보면 부정확하다. 준비 기반과 역할은 달랐지만 계열 사이의 연락은 있었다. 학생 계열은 비밀 유지 등을 고려해 별도 준비를 이어갔다."},{"question":"권오설과 천도교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answer":"권오설은 사회주의 계열의 거사 준비를 이끈 중심 인물이었다. 천도교 일부 세력은 격문 인쇄와 지방 조직 활용에 참여했다. 이들의 계획은 거사 전 발각과 검거로 큰 타격을 받았다."},{"question":"사전 검거 뒤에도 학생 시위가 실행된 이유는 무엇인가?","answer":"학생들의 학교별 연락망과 준비 활동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격문을 만들고 동료에게 전달했다. 준비 세력 일부의 검거가 모든 학생 계획의 중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question":"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자연과학 동아리였는가?","answer":"자연과학 연구만을 목적으로 한 동아리가 아니었다. 사회과학 연구와 학생의 단결을 추진한 학생운동 단체였다. 6·10만세운동의 준비와 실행에 참여했다."},{"question":"대한독립당 격고문은 현장에서 배포된 학생 격문인가?","answer":"학생들이 현장에서 배포한 모든 격문과 같은 문서가 아니다. 「대한독립당 격고문」은 대중적으로 배포되지 못한 사전 준비 문서다. 『재등실문서』 10의 198~201쪽에 일본어 역문으로 보존되어 있다."},{"question":"6·10만세운동은 서울에서만 영향을 미쳤는가?","answer":"서울이 주요 시위의 중심이었지만 영향은 지방에도 나타났다. 고창과 인천 등에서는 만세시위가 확인된다. 여러 학교에서는 애도 통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도 벌어졌다."},{"question":"6·10만세운동은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는가?","answer":"당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군경의 진압과 검거로 시위의 확대가 제약되었다. 학생들이 학교 간 연결망을 통해 집단행동을 실행했다는 의미가 남았다."},{"question":"학생 관련 재판의 결과는 무엇인가?","answer":"1926년 6월 25일 학생 관련 피고인 11명이 기소되었다. 1927년 3월 25일 2심에서 10명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유면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question":"6·10만세운동과 신간회는 어떻게 연결되는가?","answer":"서로 다른 계열의 협력 경험은 신간회 성립의 배경으로 이해된다. 신간회 창립에는 자치론에 대한 반대와 정우회선언도 작용했다. 6·10만세운동만을 유일한 원인으로 설명하면 부정확하다."},{"question":"격문 인쇄량을 실제 참가자 수로 계산할 수 있는가?","answer":"인쇄량만으로 참가자 수를 계산할 수 없다. 인쇄·전달·현장 배포·열람은 서로 다른 단계다. 인쇄량 자체도 회고와 판결문에서 차이가 나타난다."}],"sources":[{"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300","title":"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6·10 만세운동」","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10","title":"『신편 한국사』 49권, 「융희황제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30","title":"『신편 한국사』 49권,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40","title":"『신편 한국사』 49권,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40_0060_0040_0030","title":"『신편 한국사』 49권, 「6·10학생운동의 전개」","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50_0020","title":"『신편 한국사』 49권, 「지방의 움직임과 만세시위」","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124_0030","title":"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6·10 만세 운동 격문」","type":"source"},{"url":"https://db.history.go.kr/id/hn_026_0060_0020_0020","title":"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론』, 「일제하 청년운동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 중 학생운동","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ganada=\u0026levelId=tg_004_2010\u0026pageUnit=10\u0026treeId=0106","title":"우리역사넷 교과서 용어 해설,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20_0010","title":"『신편 한국사』 49권, 신간회운동 「창립 배경」","type":"source"}],"images":[{"id":2336,"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Y0NjEsInB1ciI6ImJsb2JfaWQifX0=--c0c56fa39f6116fe97b8c744d4120789d5bfc5fc/ai-ca927de9.webp","is_representative":true,"generation_method":"ai_infographic","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visible_locales":["ko"],"translations":{"ko":{"alt":"6·10만세운동의 준비 세력 연대, 검거 뒤 격문 제작, 시위와 재판, 학생 조직 역량과 기록을 정리한 4분할 인포그래픽","caption":"6·10만세운동은 탄압 속에서도 학생들의 조직 역량을 드러냈다.","description":null},"en":{"alt":"Four-panel infographic on June 10 Movement preparations, arrests, leaflet production, protests, trials and records.","caption":"Despite repression, the June 10 Movement demonstrated students’ capacity to organize.","description":null},"ja":{"alt":"六・一〇万歳運動の準備勢力の連携、検挙後の檄文制作、示威と裁判、学生の組織力と記録をまとめた4分割の図解","caption":"六・一〇万歳運動は、弾圧の中でも学生たちの組織力を示した。","description":null},"es":{"alt":"Infografía en cuatro partes sobre preparativos, detenciones, octavillas, protestas y juicios del Movimiento del 10 de Junio.","caption":"Pese a la represión, el Movimiento del 10 de Junio demostró la capacidad de organización estudiantil.","description":null},"id":{"alt":"Infografik empat panel tentang persiapan, penangkapan, selebaran, demonstrasi, dan persidangan Gerakan 10 Juni.","caption":"Meski menghadapi penindasan, Gerakan 10 Juni menunjukkan kemampuan para pelajar dalam berorganisasi.","description":null},"pt":{"alt":"Infográfico em quatro partes sobre preparativos, prisões, panfletos, protestos e julgamentos do Movimento de 10 de Junho.","caption":"Apesar da repressão, o Movimento de 10 de Junho demonstrou a capacidade de organização dos estudantes.","description":null},"zh-hant":{"alt":"四格資訊圖表，整理六一〇萬歲運動的籌備力量聯繫、逮捕後的檄文製作、示威與審判，以及學生組織能力和文獻","caption":"六一〇萬歲運動雖受鎮壓限制，仍展現了學生的組織能力。","description":null},"de":{"alt":"Viergeteilte Infografik zu Vorbereitung, Verhaftungen, Flugblättern, Protesten und Prozessen der Bewegung vom 10. Juni.","caption":"Trotz der Unterdrückung bewies die Bewegung vom 10. Juni die Organisationsfähigkeit der Schüler.","description":null}}},{"id":2334,"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Y0NDksInB1ciI6ImJsb2JfaWQifX0=--acb994fb27dae5ec7026ada8f84cf838ede0e112/ai-862ba288.webp","is_representative":false,"generation_method":"ai_semi","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translations":{"ko":{"alt":"등불이 켜진 방에서 학생들이 수동 인쇄기로 격문을 찍고 종이를 정리하는 모습을 그린 역사 재현화","caption":"사전 검거 뒤에도 학생들은 격문 제작을 이어가며 시위를 준비했다.","description":null},"en":{"alt":"Historical painting of students printing and sorting leaflets by lamplight, with a hand press and stacks of paper","caption":"Despite arrests before the protest, students continued producing leaflets and preparing for demonstrations.","description":null},"ja":{"alt":"灯火のともる部屋で、学生たちが手動印刷機で檄文を刷り、紙を整理する様子を描いた歴史再現画","caption":"事前検挙の後も、学生たちは檄文の制作を続け、示威運動を準備した。","description":null},"es":{"alt":"Pintura histórica de estudiantes que imprimen y ordenan octavillas con una prensa manual a la luz de una lámpara","caption":"Pese a las detenciones previas, los estudiantes siguieron produciendo octavillas y preparando las protestas.","description":null},"id":{"alt":"Lukisan sejarah pelajar mencetak dan memilah selebaran dengan mesin cetak manual di bawah cahaya lampu","caption":"Meski terjadi penangkapan sebelum aksi, para pelajar terus membuat selebaran dan mempersiapkan demonstrasi.","description":null},"pt":{"alt":"Pintura histórica de estudantes imprimindo e organizando panfletos com uma prensa manual à luz de um lampião","caption":"Apesar das prisões prévias, os estudantes continuaram produzindo panfletos e preparando as manifestações.","description":null},"zh-hant":{"alt":"歷史重現畫中，學生們在燈光下操作手動印刷機印製檄文，並整理成疊的紙張","caption":"事前搜捕後，學生們仍持續製作檄文，籌備示威。","description":null},"de":{"alt":"Historische Darstellung: Studenten drucken und sortieren Flugblätter bei Lampenlicht an einer Handpresse","caption":"Trotz vorheriger Verhaftungen stellten die Studenten weiter Flugblätter her und bereiteten die Proteste vor.","description":null}}},{"id":2335,"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Y0NTUsInB1ciI6ImJsb2JfaWQifX0=--9486bc9d027f801983fd5b482b22a4aefd84ab84/ai-846d6534.webp","is_representative":false,"generation_method":"ai_semi","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translations":{"ko":{"alt":"순종의 장례 행렬과 조문 인파가 모인 거리에서 학생들이 격문을 나눠 주는 모습을 그린 역사 재현화","caption":"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실행되었다.","description":null},"en":{"alt":"Historical painting of students handing out leaflets amid crowds along Sunjong’s funeral route","caption":"The June 10 Movement took place on June 10, 1926, the day of Emperor Sunjong’s funeral.","description":null},"ja":{"alt":"純宗の葬列を見送る群衆が集まる通りで、学生たちが檄文を配る様子を描いた歴史再現画","caption":"6・10万歳運動は、純宗の葬儀が行われた1926年6月10日を機に実行された。","description":null},"es":{"alt":"Recreación pictórica de estudiantes repartiendo octavillas entre la multitud durante el funeral de Sunjong","caption":"El Movimiento del 10 de Junio se llevó a cabo el 10 de junio de 1926, día del funeral del emperador Sunjong.","description":null},"id":{"alt":"Lukisan rekonstruksi sejarah pelajar membagikan selebaran di antara kerumunan sepanjang rute pemakaman Sunjong","caption":"Gerakan 10 Juni dilaksanakan pada 10 Juni 1926, bertepatan dengan hari pemakaman Kaisar Sunjong.","description":null},"pt":{"alt":"Reconstituição pintada de estudantes distribuindo panfletos entre a multidão durante o funeral de Sunjong","caption":"O Movimento de 10 de Junho ocorreu em 10 de junho de 1926, dia do funeral do imperador Sunjong.","description":null},"zh-hant":{"alt":"歷史重建畫，描繪學生在純宗送葬路線旁的人群中散發傳單","caption":"六一〇萬歲運動於1926年6月10日純宗舉行葬禮之日發動。","description":null},"de":{"alt":"Historiengemälde mit Schülern, die entlang von Sunjongs Trauerzug Flugblätter an die Menschenmenge verteilen","caption":"Die Bewegung vom 10. Juni fand am 10. Juni 1926 statt, dem Tag der Beisetzung von Kaiser Sunjong.","description":null}}}],"published_at":"2026-11-01T13:48:04+09:00","updated_at":"2026-11-01T13:48:04+09:00","license":"cc_by","translation_status":"original","available_locales":["ko","en","ja","es"],"data_locales":["ko","en","ja","es","id","pt","zh-hant","de"],"url":"https://injoys.com/ko/articles/june-10-movement-1926-student-preparation-and-signific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