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1926년 학생 시위의 준비와 의미 ============================ 6·10만세운동은 1926년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실행된 항일운동이다. 준비 세력의 연대와 차이, 사전 검거 뒤 학생들의 격문 제작, 시위와 재판을 나누어 볼 수 있다. -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에 실행되었다. - 노총계와 학생 중심의 사직동계·통동계는 역할과 준비 기반이 달랐다. - 학생들은 사전 검거 뒤에도 학교 간 연락과 격문 제작을 이어갔다. - 「대한독립당 격고문」은 대중적으로 배포되지 못한 사전 준비 문서다. - 6·10만세운동은 탄압으로 제약되었지만 학생들의 조직 역량을 드러냈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학생들이 실행한 항일시위다. 사전 검거와 감시 속에서도 학교 간 연락과 격문 배포로 시위를 이어갔다. 조직적인 학생 항일운동의 역량을 보여 준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 글은 우리역사넷의 사료·해설을 따르며 2026년 11월에 확인했다. 순종의 장례일이 거사일이 된 배경 순종의 장례일은 학생과 군중이 같은 장소에 모이는 계기였다. 인산일은 왕이나 황제의 장례를 치르는 날을 뜻한다. 순종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항의가 겹쳐 있었다. 식민 당국은 3·1운동과 같은 시위의 재현을 경계했다. 애도 집회는 통제 대상이었고 주요 인물과 단체는 감시 대상이었다. 준비 세력은 이런 제약 속에서 공개 집회 대신 비밀 연락을 활용했다. 배경은 『신편 한국사』의 운동 태동 해설에 서술되어 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학교 사이의 연결 기반이었다. 이 단체는 사회과학 연구와 학생들의 단결을 추진했다. 단순한 자연과학 동아리로 이해하면 당시 활동을 놓치게 된다. 단체의 성격은 우리역사넷 교과서 용어 해설에서 확인된다. 준비부터 재판까지의 연표 준비는 순종의 장례 이전에 시작되었고 재판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아래 연표는 주요 전환점을 날짜별로 구분한 것이다. 출처의 절 제목은 각 사건을 확인할 위치를 가리킨다. 시기 주요 사건 출처 1926년 4월 순종의 죽음 뒤 애도와 항일 분위기 확산 『신편 한국사』 「융희황제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 1926년 5월 20일 박하균의 하숙집에서 학생 대표들이 거사 준비 협의 『신편 한국사』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 1926년 6월 초 권오설 등과 연결된 준비 계획 발각과 검거 『신편 한국사』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 1926년 6월 8일과 9일 학생들의 격문 제작·전달과 지방 학교 발송 『신편 한국사』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 주변에서 만세시위 실행 『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1926년 6월 25일 학생 관련 피고인 11명 기소 『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1926년 11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 개정 『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1927년 3월 25일 2심에서 10명에게 징역 1년의 실형 선고 『신편 한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노총계·사직동계·통동계의 차이 세 계열은 구별되지만 서로 완전히 단절된 집단은 아니었다. 학생 쪽에도 전문학교와 중등학교를 잇는 연결이 있었다. 따라서 계열명은 준비 기반을 구분하는 명칭으로 이해해야 한다. 구분 중심 인물과 기반 준비의 특징 거사 직전 상황 노총계 권오설 등 사회주의 계열 인사 천도교 일부 세력과 연대하여 인쇄·전국 연락망 준비 계획 발각과 검거로 큰 타격 사직동계 이병립·이선호·박하균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기반 전문학교·고등보통학교 학생 연결과 격문 준비 사전 검거 뒤 자체 인쇄와 전달 추진 통동계 박용규·이동환·곽대형 등, 중앙고보·중동학교 학생 중심 별도 모임에서 격문 제작과 동료 포섭 자체 준비를 이어가며 다른 학생 계열과 연락 권오설은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와 연결된 준비의 중심 인물이었다. 천도교 쪽은 인쇄와 지방 조직 활용에 참여했다. 이를 노동자만의 계획으로 축소하면 실제 연대 관계가 사라진다. 이 관계는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에 설명되어 있다. 학생 계열도 준비 과정에서 서로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이선호와 통동계 학생들 사이에 연락이 이루어졌다. 비밀 유지와 남은 시간을 고려해 준비 조직은 합치지 않았다. 이 점은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에 근거한다. 사전 검거 뒤 격문을 마련한 과정 핵심 전환점은 사전 검거 뒤 학생들이 자체 준비를 이어간 데 있다. 격문은 운동의 주장과 참여 요청을 담은 글이다. 학생들은 하숙방과 학교별 인맥을 제작·전달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신편 한국사』는 학생들의 자체 인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김낙환은 인쇄기를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김규봉은 종이를 구했고 학생들은 이석훈의 집에서 인쇄했다. 사직동계의 인쇄량은 1926년 6월 9일까지 1만여 장으로 서술된다. 통동계도 별도의 격문을 준비했다. 전달 대상에는 서울의 학교와 지방 학교가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직접 전달하고 지방에는 우편을 활용했다. 이 과정은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에 기록되어 있다. 하숙방은 회의와 인쇄를 진행하는 장소였다. 학교별 연락망은 격문을 동료 학생에게 전달하는 통로였다. 지방 학교로 보낸 우편은 서울 밖으로 참여 요청을 전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준비가 모든 위험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강화된 경계 속에서 시위를 실행했다. 이후 검거가 이어졌다는 점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종로에서 이어진 시위와 그 결과 서울의 시위는 종로3가에서 시작해 여러 지점으로 이어졌다.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30분경 이선호가 만세를 선창했다. 중앙고보 학생들은 단성사 앞에서 격문을 뿌렸다. 1926년 6월 10일 시각 장소 전개 오전 8시 30분경 종로3가 단성사 앞 중앙고보 학생들의 만세와 격문 배포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 연희전문 학생들의 시위와 군중의 호응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 학생들의 만세와 격문 배포 오후 훈련원·동대문·신설동·동묘 부근 여러 지점에서 시위 지속 군경의 진압으로 시위의 확대는 제약되었다. 독립이라는 목표도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형사처벌 외에 무기정학 등 학업상의 불이익을 겪었다. 학생 관련 재판에서는 11명이 기소되었다. 1927년 3월 25일 2심에서 10명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유면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전개와 처벌은 「6·10학생운동의 전개」를 따른다. 지방의 반응은 서울과 같은 형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창과 인천 등에서는 만세시위가 확인된다. 학교의 애도 금지에 항의하는 동맹휴학도 나타났다. 지역별 양상은 「지방의 움직임과 만세시위」에 정리되어 있다. 기록과 해석 기록이 직접 보여 주는 사실과 후대의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 특히 격문은 작성 목적과 실제 배포 여부가 다를 수 있다. 학생들의 독자적 실행도 앞선 연대 관계와 함께 읽어야 한다. 대한독립당 격고문이 보여 주는 사실 「대한독립당 격고문」은 거사 전에 준비된 문서다. 우리역사넷 「6·10 만세 운동 격문」에 수록되어 있다. 출전은 『재등실문서』 10의 198~201쪽이다. 보존된 형태는 일본어 역문이다. 문서는 독립 요구와 공동투쟁의 지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격고문은 대중적으로 배포되지 못했다. 문서의 성격은 우리역사넷 사료 해설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이를 현장에서 배포된 모든 학생 격문과 동일시할 수 없다. 사전 준비 세력의 목표를 보여 주는 자료로 읽어야 한다. 현장 배포의 경로는 학생들의 별도 격문 기록으로 확인해야 한다. 연구에서 강조하는 의미 연구와 해설은 학생들의 조직 역량과 세력 간 협력을 강조한다. 학생들은 앞서 쌓인 단체 활동을 시위 준비에 활용했다.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도 독립을 위해 협력했다. 『한국사론』의 연구 검토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복합적 성격을 소개한다. 학생들의 사회주의 연구에는 민족문제 해결의 목적도 있었다. 하나의 이념만으로 모든 참여자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 논의는 「일제하 청년운동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에 정리되어 있다.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 격문의 인쇄량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통동계에 관한 박용규의 회고는 3만 장을 제시한다. 『신편 한국사』가 대조한 판결문에는 약 5,000장으로 나온다. 이처럼 차이가 있으므로 어느 기록의 숫자인지 밝혀야 한다. 회고의 숫자를 판결문의 숫자로 바꾸어 인용해서는 안 된다. 실제 배포량도 인쇄량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수치 차이는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의 주석에 명시되어 있다. 인쇄량과 참가자 수를 구분하는 법 운동의 규모를 설명하는 숫자는 집계 대상을 함께 밝혀야 한다. 인쇄한 종이의 수와 글을 읽은 사람의 수는 다르다. 장례에 참여한 인원도 실제 시위 인원과 같은 집계가 아니다. 기록의 숫자나 구분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 피해야 할 해석 1926년 6월 10일 학생 2만 4,000여 명 장례 행렬 주변에 도열한 학생 모두가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단정 1926년 6월 25일 기소된 11명 학생 관련 재판의 기소 인원 전체 준비자나 체포자가 11명이었다는 설명 격문 인쇄량 제작된 인쇄물의 수 같은 수의 사람이 받아 읽었다는 계산 격고문의 보존 문서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그 문서가 현장에서 널리 배포되었다는 추정 앞의 두 숫자는 「6·10학생운동의 전개」에 나온다. 여기서의 구분은 기록의 집계 범위를 비교한 설명이다. 자료를 인용할 때에는 숫자와 함께 날짜·대상·행위를 붙여야 한다. 학생운동사에서 오늘도 배우는 이유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시위를 조직한 방식을 보여 준다. 참여 의사를 모으는 일과 현장에서 실행하는 일은 구별된다. 하숙방의 회의와 인쇄·전달 기록은 그 사이의 과정을 드러낸다. 역사적 위치는 다음처럼 나누어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축적된 학생 단체 활동이 집단 시위로 이어졌다.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일부 세력의 협력은 민족협동전선의 경험이었다. 검거 뒤에도 학생운동 조직의 활동은 이어졌다. 6·10만세운동의 연대 경험은 신간회 성립의 배경으로 이해된다. 다만 신간회 창립에는 자치론에 대한 반대도 작용했다. 정우회선언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참여 배경이었다. 이를 구분하는 근거는 『신편 한국사』 「창립 배경」에 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이후 학교별 독서회 조직에도 관여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서울 시위와 확산에 참여했다. 이런 조직 활동은 두 사건 사이의 연결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관련 내용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해설에 설명되어 있다. FAQ Q. 6·10만세운동은 언제 일어났는가? A.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에 일어났다. 서울의 장례 행렬 주변에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렸다. Q. 왜 순종의 장례일을 거사일로 정했는가? A. 장례는 학생과 군중이 한곳에 모이는 계기였다. 순종에 대한 애도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항의와 연결되었다. 준비 세력은 장례 행렬 주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려 했다. Q. 노총계·사직동계·통동계는 하나의 조직이었는가? A. 하나로 통합된 조직으로 보면 부정확하다. 준비 기반과 역할은 달랐지만 계열 사이의 연락은 있었다. 학생 계열은 비밀 유지 등을 고려해 별도 준비를 이어갔다. Q. 권오설과 천도교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A. 권오설은 사회주의 계열의 거사 준비를 이끈 중심 인물이었다. 천도교 일부 세력은 격문 인쇄와 지방 조직 활용에 참여했다. 이들의 계획은 거사 전 발각과 검거로 큰 타격을 받았다. Q. 사전 검거 뒤에도 학생 시위가 실행된 이유는 무엇인가? A. 학생들의 학교별 연락망과 준비 활동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격문을 만들고 동료에게 전달했다. 준비 세력 일부의 검거가 모든 학생 계획의 중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Q.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자연과학 동아리였는가? A. 자연과학 연구만을 목적으로 한 동아리가 아니었다. 사회과학 연구와 학생의 단결을 추진한 학생운동 단체였다. 6·10만세운동의 준비와 실행에 참여했다. Q. 대한독립당 격고문은 현장에서 배포된 학생 격문인가? A. 학생들이 현장에서 배포한 모든 격문과 같은 문서가 아니다. 「대한독립당 격고문」은 대중적으로 배포되지 못한 사전 준비 문서다. 『재등실문서』 10의 198~201쪽에 일본어 역문으로 보존되어 있다. Q. 6·10만세운동은 서울에서만 영향을 미쳤는가? A. 서울이 주요 시위의 중심이었지만 영향은 지방에도 나타났다. 고창과 인천 등에서는 만세시위가 확인된다. 여러 학교에서는 애도 통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도 벌어졌다. Q. 6·10만세운동은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는가? A. 당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군경의 진압과 검거로 시위의 확대가 제약되었다. 학생들이 학교 간 연결망을 통해 집단행동을 실행했다는 의미가 남았다. Q. 학생 관련 재판의 결과는 무엇인가? A. 1926년 6월 25일 학생 관련 피고인 11명이 기소되었다. 1927년 3월 25일 2심에서 10명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유면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Q. 6·10만세운동과 신간회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A. 서로 다른 계열의 협력 경험은 신간회 성립의 배경으로 이해된다. 신간회 창립에는 자치론에 대한 반대와 정우회선언도 작용했다. 6·10만세운동만을 유일한 원인으로 설명하면 부정확하다. Q. 격문 인쇄량을 실제 참가자 수로 계산할 수 있는가? A. 인쇄량만으로 참가자 수를 계산할 수 없다. 인쇄·전달·현장 배포·열람은 서로 다른 단계다. 인쇄량 자체도 회고와 판결문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Sources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6·10 만세운동」: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300 - 『신편 한국사』 49권, 「융희황제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10 - 『신편 한국사』 49권,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30 - 『신편 한국사』 49권,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40 - 『신편 한국사』 49권, 「6·10학생운동의 전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40_0060_0040_0030 - 『신편 한국사』 49권, 「지방의 움직임과 만세시위」: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10_0050_0020 -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6·10 만세 운동 격문」: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124_0030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론』, 「일제하 청년운동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 중 학생운동: https://db.history.go.kr/id/hn_026_0060_0020_0020 - 우리역사넷 교과서 용어 해설,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ganada=&levelId=tg_004_2010&pageUnit=10&treeId=0106 - 『신편 한국사』 49권, 신간회운동 「창립 배경」: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30_0020_0010 Images - 6·10만세운동의 준비 세력 연대, 검거 뒤 격문 제작, 시위와 재판, 학생 조직 역량과 기록을 정리한 4분할 인포그래픽: 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Y0NjEsInB1ciI6ImJsb2JfaWQifX0=--c0c56fa39f6116fe97b8c744d4120789d5bfc5fc/ai-ca927de9.webp - 등불이 켜진 방에서 학생들이 수동 인쇄기로 격문을 찍고 종이를 정리하는 모습을 그린 역사 재현화: 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Y0NDksInB1ciI6ImJsb2JfaWQifX0=--acb994fb27dae5ec7026ada8f84cf838ede0e112/ai-862ba288.webp - 순종의 장례 행렬과 조문 인파가 모인 거리에서 학생들이 격문을 나눠 주는 모습을 그린 역사 재현화: 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zY0NTUsInB1ciI6ImJsb2JfaWQifX0=--9486bc9d027f801983fd5b482b22a4aefd84ab84/ai-846d6534.webp --- Category: 지식 베이스 Source: https://injoys.com/ko/articles/june-10-movement-1926-student-preparation-and-significance License: cc_by Translation-Status: origi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