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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처인성 전투 1232년 주민 항전의 과정과 결과"
locale: ko
category: case_study
category_name: "사례 연구"
translation_status: original
license: cc_by
author: "인조이스 편집팀"
source_url: https://injoys.com/ko/articles/cheoinseong-battle-1232-resistance-and-outcome
published_at: 2026-10-09T09:29:1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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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인성 전투 1232년 주민 항전의 과정과 결과

> 처인성에서는 1232년 처인부곡 주민들이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몽골군 지휘관의 전사는 2차 침입의 종결로 이어졌지만, 김윤후의 직접 사격 여부와 처인현 승격 시점은 기록을 구분해 설명해야 한다.

## Key Points

- 처인성의 항전은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지금의 용인 지역에서 벌어졌다.
- 처인부곡 주민들의 저항과 몽골군 지휘관 살리타이의 전사는 몽골군 철수로 이어졌다.
- 『고려사』는 김윤후의 사격을 서술하면서 그가 활과 화살이 없었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 몽골의 2차 침입은 끝났지만 고려와 몽골 사이의 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처인현 승격을 전투 직후의 확정된 포상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처인성 전투는 **1232년** 처인부곡 주민들이 몽골의 2차 침입에 맞선 싸움이다. 승려 김윤후도 성 안에서 항전에 참여했다. 몽골군 지휘관의 전사 뒤 철군을 이끌어 낸 지역 주민의 승리로 기억된다.

이 글의 내용은 『고려사』 김윤후 열전을 바탕으로 2026년 10월에 확인한 것이다.

## 몽골군은 왜 처인성까지 내려왔나

몽골군은 고려를 다시 압박하는 과정에서 처인성까지 진격했다. 고려는 1231년 몽골의 첫 대규모 침입을 겪었다. 화친 뒤에도 몽골의 공물과 인질 요구가 이어졌다.

1232년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몽골군에 맞서려는 선택이었다. 몽골은 고려의 천도에 반발하며 다시 침입했다.

살리타이가 이끈 몽골군 본대는 개경을 지나 남하했다. 광주에서 저항에 부딪힌 뒤 처인성 방면으로 움직였다. 살리타이는 한국사 문헌에서 살례탑으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 주민들은 어떤 조건에서 항전했나

처인성은 주변 주민들이 침입을 피해 모여든 방어 거점이었다. 입보는 주민들이 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피하는 방식을 뜻한다. 처인성에서는 피난한 주민들이 성을 지키는 싸움에 나섰다.

당시 처인은 부곡으로 편제된 지역이었다. 부곡은 일반 군현과 구별해 관리하던 지방 구역이다. 그 주민들은 일반 군현 주민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 주민 모두를 노비라고 볼 수는 없다.

김윤후는 인근 백현원에서 생활하던 승려였다. 『고려사』는 그도 전란을 피해 처인성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이후 항전에서 공을 인정받으며 무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 용어 | 이 전투에서의 뜻 |
| --- | --- |
| 처인부곡 | 항전에 참여한 주민들의 생활 기반이던 지방 구역 |
| 처인성 | 주민들이 피난하고 방어에 이용한 성 |
| 농성 | 성 안에 머물며 외부의 공격에 맞서는 싸움 |
| 승장 | 군사 활동을 이끈 승려를 가리키는 말 |

## 침입부터 철군까지의 연표

전투는 강화 천도와 몽골의 재침입이 이어진 해에 벌어졌다. 아래 월 표기는 역사 기록의 음력을 따른다. 날짜를 오늘날의 양력으로 바꾸어 적지 않았다.

| 시기 | 사건 | 확인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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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1년 | 몽골의 첫 대규모 고려 침입 | 우리역사넷 「몽골의 침입과 김윤후의 활약」 |
| 1232년 7월 | 고려 조정의 강화 천도 |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
| 1232년 8월 | 몽골이 살리타이에게 고려 공격을 지시 |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
| 1232년 11월 | 몽골군이 광주를 공격했으나 방어를 뚫지 못함 |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
| 1232년 12월 | 처인성에서 살리타이가 전사 |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
| 살리타이 전사 이후 | 몽골군 철수와 2차 침입 종결 |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
| 1235년 | 몽골의 3차 침입 시작 | 『신편 한국사』 20권 |

처인성역사교육관은 전투일을 음력 12월 16일로 안내한다. 우리역사넷 해설은 12월경으로 서술한다. 날짜를 인용할 때는 출처의 정밀도를 함께 남겨야 한다. [처인성역사교육관 상설 전시](https://www.yongin.go.kr/cis/displayExp/permanent.jsp)

## 전환점은 몽골군 지휘관의 전사였다

전투의 전환점은 성을 공격하던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 사건이었다. 몽골군은 총지휘관을 잃은 뒤 철수했다. 주민들의 방어전이 침입군 전체의 움직임에 영향을 준 것이다.

다만 전투의 세부 진행을 복원할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양측 병력 규모나 정확한 사격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매복 장면이나 지휘 명령을 사실처럼 덧붙여서는 안 된다.

## 처인성 전투 결과와 전쟁의 범위

직접적인 결과는 **몽골의 2차 침입 종결**이었다. 성을 지킨 주민들의 항전이 몽골군 철수로 이어졌다. 그러나 고려와 몽골의 전쟁 전체가 끝난 것은 아니다.

몽골은 1235년에 다시 고려를 침입했다. 따라서 전투의 승리와 장기 전쟁의 종결은 구분해야 한다. 이후 침입은 『신편 한국사』의 대몽항쟁 서술에서도 확인된다. [『신편 한국사』 20권, 서북지역에서의 항전](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20_0030_0010_0030_0020_0010&whereStr=)

김윤후에게는 상장군 관직이 제시되었다. 그는 큰 포상을 사양했고, 조정은 섭낭장으로 임명했다. 『고려사』는 뒤에 그가 충주 방어에서도 활동했다고 전한다.

## 기록과 해석

김윤후의 공적과 직접 활을 쏜 사람의 신원은 나누어 읽어야 한다. 같은 열전에 서로 어긋나는 서술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적힌 내용과 그 내용을 설명하는 해석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 『고려사』가 전하는 내용

『고려사』 권103 김윤후 열전은 그가 살리타이를 쏘았다고 서술한다. 이어 김윤후가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고 기록한다. 포상을 사양한 말도 함께 실려 있다.

> 싸울 때 내게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큰 상을 헛되이 받겠습니까?

『고려사』 권103 열전 김윤후에 전하는 말이다.

이 발언은 직접 사격 여부를 판단할 때 함께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 말만으로 다른 사격자를 특정할 수는 없다. 사료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모두 보존하는 설명이 필요하다. [『고려사』 권103 김윤후 열전](https://db.history.go.kr/id/kr_103_0010_0100)

### 역사 해설에서 공통으로 강조하는 점

대표적인 역사 해설은 김윤후의 역할과 주민들의 항전을 함께 설명한다. 다만 김윤후의 직접 사격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아래 차이를 학계 전체의 단일한 결론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 해설 | 김윤후의 역할을 설명하는 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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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윤후의 사격을 서술하며 주민과 승려들의 호응을 강조 |
|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 포상 사양 기록을 함께 검토하며 주민 독려와 지휘 역할을 추정 |

### 아직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

살리타이에게 적중한 화살의 사격자는 신중하게 서술해야 한다. 김윤후가 공을 사양한 이유 역시 확정하기 어렵다. 겸양의 표현인지 실제 역할 차이인지는 추가 근거가 필요하다.

주민들이 성을 지켰다는 사실은 별도로 설명할 수 있다. 개인의 사격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집단의 항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는 서로 다른 범위의 주장이라는 뜻이다.

## 처인현 승격은 전투 직후였나

처인현 승격을 전투 직후의 조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리역사넷은 정확한 승격 시점을 알 수 없다고 설명한다. 승전의 포상이었을 가능성도 추정으로 제시한다.

다른 기록에는 조선 초기의 행정 변화가 나타난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태조 6년에 처인에 현령을 두었다고 전한다. 디지털용인문화대전은 1397년을 현 승격 시점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현 승격과 현령 설치를 구분해 대조할 필요가 있다.

| 확인 대상 | 기록 또는 해설의 내용 | 해석할 때의 한계 |
| --- | --- | --- |
| 승전과 처인현 승격의 관계 | 우리역사넷은 포상이었을 가능성을 제시 | 정확한 시점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확정하지 않음 |
| 현령 설치 | 『세종실록』 지리지는 태조 6년의 설치를 기록 | 현령 설치만으로 앞선 행정 지위 전체를 설명하기 어려움 |
| 1397년 승격 설명 | 디지털용인문화대전이 제시 | 전투 직후 승격이라는 설명과 구분해 검토해야 함 |

행정 변화의 명칭이 같아 보여도 근거 문구는 다를 수 있다. 승격과 관리 배치의 시점을 하나의 연도로 합치면 차이가 사라진다. 전투의 공로와 후대의 행정 연혁을 연결할 때 생기는 문제다. [『세종실록』 지리지 용인현](https://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kda_40004003_005), [디지털용인문화대전 「처인성」](https://yongin.grandculture.net/yongin/toc/GC00900631)

## 오늘날 이 전투를 읽는 의미

이 전투는 지역 주민의 역할을 통해 고려의 전쟁사를 보여준다. 낮은 대우를 받던 부곡민도 방어의 주체로 등장한다. 승려 김윤후의 이력은 당시 항전 참여자의 폭을 드러낸다.

또한 역사적 공로가 기록되는 방식을 검토할 수 있다. 인물 열전은 김윤후에게 초점을 맞춘다. 전투 해설은 주민 공동체의 역할을 함께 복원한다. 두 관점을 연결하면 개인의 공적과 집단의 행동을 구분할 수 있다.

## 자주 묻는 질문

### 전투 장소는 어디인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아곡리 일대다. 주민들이 방어 거점으로 삼은 처인성 유적이 남아 있다. 현재의 유적 모습만으로 당시 전투 장면을 복원할 수는 없다.

### 김윤후는 처음부터 장군이었나

『고려사』는 김윤후를 백현원에서 생활하던 승려로 소개한다. 전란을 피해 처인성에 들어온 뒤 공을 인정받았다. 이후 무관으로 활동하며 충주 방어에도 참여했다.

### 살리타이와 살례탑은 다른 사람인가

이 전투를 설명하는 문헌에서는 같은 몽골군 지휘관을 가리킨다. 자료에 따라 살리타이 또는 살례탑으로 적는다. 표기가 다르다고 별개의 지휘관으로 세어서는 안 된다.

### 부곡 주민은 모두 노비였나

일반 군현민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는 설명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다. 부곡은 지방의 편제와 관련된 명칭이다. 처인부곡민 전체를 노비와 동일시하는 서술은 피해야 한다.

### 승리 뒤 몽골의 침입이 완전히 끝났나

1232년의 2차 침입이 끝난 것이다. 몽골은 1235년에 다시 침입했다. 한 차례 침입의 종결과 장기 전쟁의 종결은 서로 다르다.

### 김윤후가 활을 쏘았다고 단정해도 되나

『고려사』에 그렇게 서술되어 있다는 설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기록에는 활과 화살이 없었다는 그의 말도 있다. 직접 사격을 확정하려면 이 상반된 내용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 FAQ

### 처인성의 항전은 언제 일어났나?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일어났다. 우리역사넷은 12월경으로 설명하며, 처인성역사교육관은 음력 12월 16일로 안내한다.

### 전투 장소는 현재 어디인가?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아곡리 일대다. 전투의 방어 거점이었던 처인성 유적이 남아 있다.

### 김윤후는 어떤 인물이었나?
『고려사』는 김윤후를 백현원에서 생활하던 승려로 소개한다. 처인성에서 공을 인정받은 뒤 무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충주 방어에서도 활약했다.

###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직접 쏘았나?
『고려사』는 김윤후가 쏘았다고 서술한다. 동시에 그가 활과 화살이 없었다며 포상을 사양했다고 기록한다. 두 내용을 함께 읽어야 하므로 직접 사격 여부는 단정하지 않는 편이 정확하다.

### 살리타이와 살례탑은 같은 사람인가?
처인성에서 전사한 몽골군 지휘관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표기다. 별개의 인물을 뜻하지 않는다.

### 주민들이 승리의 주체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처인부곡 주민들이 성에 모여 몽골군의 공격에 맞섰기 때문이다. 일반 군현민보다 낮은 대우를 받던 주민들의 항전이 몽골군 철수로 이어졌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 부곡민은 모두 노비였나?
부곡민 전체를 노비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부곡은 일반 군현과 구별해 관리하던 지방 구역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과 개인의 법적 신분은 구분해야 한다.

### 전투의 직접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살리타이가 전사한 뒤 몽골군이 철수했다. 이로써 몽골의 2차 침입이 끝났다. 고려와 몽골 사이의 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김윤후는 전투 뒤 어떤 포상을 받았나?
조정은 상장군 관직을 제시했다. 김윤후가 사양하자 섭낭장으로 임명했다. 이 내용은 『고려사』 권103 김윤후 열전에 전한다.

### 처인부곡은 승리 직후 처인현이 되었나?
전투 직후라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역사넷은 승격 시점을 알 수 없다고 설명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조선 태조 6년 현령 설치 기록도 별도로 대조해야 한다.

## Sources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몽골의 침입과 김윤후의 활약](https://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51_0010)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처인성 전투](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20&levelId=kc_i201330)
-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고려사』 권103 김윤후 열전](https://db.history.go.kr/id/kr_103_0010_0100)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처인성전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720)
- [용인시 처인성역사교육관, 상설 전시](https://www.yongin.go.kr/cis/displayExp/permanent.jsp)
-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0권, 서북지역에서의 항전](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print.do?levelId=nh_020_0030_0010_0030_0020_0010&whereStr=)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용인현](https://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kda_40004003_005)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용인문화대전, 처인성](https://yongin.grandculture.net/yongin/toc/GC00900631)

##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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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처인성 성벽 아래 주민들이 굽은 길을 따라 멀어지는 기마 병력을 바라본다.](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jYxMzAsInB1ciI6ImJsb2JfaWQifX0=--e3eb8b2ddb4c24fd8fc22ca9b1d52c4e12d82ce5/ai-8f5b8d16.we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