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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대한민국 임시정부 1932년 이후 이동과 창군 과정"
locale: ko
category: case_study
category_name: "사례 연구"
translation_status: original
license: cc_by
author: "인조이스 편집팀"
source_url: https://injoys.com/ko/articles/korean-provisional-government-1932-1940-relocation-and-army-formation
published_at: 2026-11-09T03:45: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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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1932년 이후 이동과 창군 과정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를 떠난 뒤 피난 속에서도 정부 조직과 군대 편성 계획을 이어갔다. 1940년 충칭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세웠으며, 병력 모집과 부대 확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Key Points

-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 이탈 이후 여러 도시를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 군사특파단의 병력 모집과 미주 동포의 모금은 광복군 창설을 뒷받침했다.
- 중국 측의 지휘권 요구에 맞서 임시정부는 독자적으로 창군을 추진했다.
- 1940년 9월 15일 선언문 발표와 9월 17일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은 서로 다른 사건이다.
- 창설 당시 구성이 완료된 조직은 총사령부였으며, 실제 부대와 병력은 이후 확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1940년 일본의 추격과 전쟁을 피해 이동했다. 피난 중에도 조직과 군대 편성 계획을 유지했다. 1940년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한 과정은 독립운동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한 역사로 기억된다.

이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등을 따르며 2026년 11월에 확인했다.

## 임시정부는 어떤 조직이었나

임시정부는 독립된 민주공화국을 세우려는 정부 조직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국내외의 정부 수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4월 11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에는 국내외 임시정부 세력을 통합했다.

1919년 임시헌장은 민주공화제를 국가 운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임시정부는 외교와 독립자금 조달에 나섰다. 교육과 역사 편찬도 정부 활동에 포함되었다. 군대 편성 역시 수립 초기부터 추진한 과제였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사이버기념관](https://www.nmkpg.go.kr/meta/timeline)

## 상하이를 떠난 배경

1932년 상하이 이탈의 직접적인 배경은 일본의 추적이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은 배후 조직을 수색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체포 위험을 피해 흩어졌다.

정부 청사는 항저우(杭州)로 옮겨졌다. 김구 등 일부 요인은 자싱(嘉興)에 피신했다. 정부 소재지와 모든 요인의 거처가 일치하지는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전선 확대가 이동을 재촉했다. 일본군의 진격으로 기존 거점에 머물기 어려워졌다. 피난은 정부 업무를 수행할 장소까지 거듭 바꾸는 일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 임시정부」](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 연표

주요 청사 이동은 상하이에서 중국 내륙으로 이어졌다. 아래 표는 정부의 주요 활동 거점을 정리한 것이다. 요인 개인의 피신처와 모든 경유지를 나열한 표는 아니다.

| 시기 | 주요 거점과 사건 | 확인 출처 |
| --- | --- | --- |
| 1932년 5월 |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이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
| 1935년 11월 | 전장(鎭江)으로 이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
| 1937년 말 | 중일전쟁 중 창사(長沙)로 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
| 1938년 7월 | 광저우(廣州)에 청사 마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
| 1938년 하반기 | 일본의 공격을 피해 류저우(柳州)로 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기념관 연표 |
| 1939년 5월 | 치장(綦江)에 도착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10권 해제 |
| 1940년 9월 | 충칭(重慶)에 정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기념관 연표 |
| 1940년 9월 15일 | 김구 명의로 광복군 선언문 발표 | 우리역사넷 「한국광복군 선언문」 |
| 1940년 9월 17일 | 충칭에서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개최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창군 해설 |

세부 이동 월은 해설 자료 사이에 차이가 있다. 류저우 이동은 백과사전에서 10월 출발로 설명한다. 기념관 연표에는 11월 이동으로 적혀 있다. 표에는 두 자료가 공통으로 뒷받침하는 시기를 썼다.

## 피난 중 군대 편성은 어떻게 준비했나

창군 준비는 충칭 정착 이전부터 진행되었다. 임시정부는 군사간부 양성을 추진해 왔다. 1934년에는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었다. 1937년에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광복군」](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134)

군대 조직에는 병력과 운영비가 필요했다.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기 위한 협의도 과제였다. 각 준비 과제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달랐다.

| 준비 과제 | 추진 내용 | 창군과 연결된 기능 |
| --- | --- | --- |
| 병력 모집 | 조성환을 책임자로 군사특파단을 조직해 시안(西安) 방면에 파견 | 화북 지역 한인을 모집할 기반 마련 |
| 운영비 확보 | 미주 동포에게 창군 계획을 알리고 후원 요청 | 군대 조직을 추진할 재원 확보 |
| 중국과의 협의 | 군대 편성에 대한 양해와 재정 지원 요청 | 중국 내 군사활동의 조건 협의 |

군사특파단은 현지 중국군의 협조를 받아 모집 활동을 벌였다. 미주 동포들은 모금으로 창군을 지원했다. 다만 동포 후원만으로 군 운영비를 모두 충당하기는 어려웠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한국광복군 창설과 초기 운영」](https://www.nmkpg.go.kr/webzine/story/cn.do?rid=368)

## 충칭 정착과 독자 창군의 전환점

전환점은 중국과의 협의가 지연되는 가운데 내린 독자 창군 결정이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5월 군대 편성 계획서를 제출했다. 문서의 이름은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이다.

중국 측은 광복군을 중국군 지휘 아래 두려 했다. 임시정부는 자체 군대의 지휘권을 지키려 했다. 군대 창설에 대한 원칙적 동의와 구체적 운영 합의는 달랐다.

임시정부는 협의가 마무리되기 전에 창군을 추진했다. 9월 17일 충칭에서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열었다. 이는 중국 당국과의 관계가 모두 정리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지휘권과 재정 지원 문제는 창설 뒤에도 남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10권 해제](https://db.history.go.kr/id/ij_010_%241exp)

## 선언문 발표와 성립전례식의 차이

선언문 발표일과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날짜는 구분해야 한다. 「한국광복군 선언문」은 **1940년 9월 15일** 발표되었다.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 겸 창설위원장 명의로 이를 발표했다.

| 구분 | 날짜 | 기록이 보여 주는 내용 |
| --- | --- | --- |
| 선언문 발표 | 1940년 9월 15일 | 창군의 근거와 항일전 수행 목적을 알림 |
|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 1940년 9월 17일 | 충칭에서 총사령부 성립을 알리는 의식 개최 |

선언문은 임시정부가 마련한 군사조직법을 근거로 들었다. 중국과 협력해 항일전을 벌이겠다는 목적도 밝혔다. 문서에는 9월 17일 총사령부를 창설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원문과 해설은 우리역사넷의 해당 사료 항목에서 확인된다. [우리역사넷 「한국광복군 선언문」](https://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127_0005)

## 창설 당시 갖춘 조직과 이후의 과제

창설 당시 구성이 완료된 조직은 총사령부였다. 처음부터 전투부대가 모두 갖추어진 상태는 아니었다. 병력 모집과 훈련은 창설 뒤에도 계속되었다.

총사령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 맡았다. 총사령부는 이후 시안으로 옮겨 모집 활동을 추진했다. 기존 군사특파단의 활동 기반이 이 과정에 활용되었다.

| 창설로 마련한 것 | 이후에 확충할 것 |
| --- | --- |
| 군대를 지휘할 총사령부 | 실제 부대를 구성할 병력 |
| 지휘부와 조직 운영의 틀 | 모집 인원의 군사훈련 |
| 임시정부 군대로서의 공식 출범 | 지속적인 군 운영 재원 |

기념관의 창군 해설은 이러한 단계적 조직화를 설명한다. 따라서 편제상의 부대와 실제 병력은 구별해야 한다. 부대 이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전력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창군 해설](https://www.nmkpg.go.kr/webzine/story/cn.do?rid=368)

## 정부 소재지와 병력 모집 거점은 왜 달랐나

정부 운영과 병력 모집에 필요한 장소의 조건은 서로 달랐다. 충칭은 임시정부가 정착한 정치적 거점이었다. 시안은 화북 지역 한인과 접촉하기에 유리한 군사활동 거점이었다.

| 장소 | 이 시기에 맡은 역할 | 함께 보아야 할 기록 |
| --- | --- | --- |
| 충칭 | 정부 운영과 광복군 총사령부의 출범 | 정부 문서와 성립전례식 기록 |
| 시안 | 군사특파단 활동과 창설 이후 병력 모집 | 모집 활동과 총사령부 이동 기록 |
| 미주 한인사회 | 창군을 위한 모금과 재정 후원 | 후원과 독립자금 관련 기록 |

이 구분은 이동사를 읽는 하나의 해석 틀이다. 정부의 위치만으로 독립운동 전체의 위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 창군은 여러 지역의 인력과 자금이 연결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10권 해제](https://db.history.go.kr/id/ij_010_%241exp)

## 창군 이후의 성과와 한계

광복군은 창설 뒤 다른 독립운동 세력을 받아들이며 확대되었다. 1941년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했다. 1942년에는 충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 병력이 편입되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광복군은 이후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협력했다. 미국 OSS와 추진한 훈련의 목적은 국내 침투였다. 계획했던 국내 침투 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해방도 정부와 군대의 조직적 귀환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광복군 인사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우리역사넷 「한국광복군」](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3810)

## 기록과 해석

당시 문서의 주장과 후대 연구의 설명은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선언문은 창군 주체가 밝힌 근거와 목적을 보여 준다. 해설 자료는 그 문서를 협상과 조직 형성의 과정에 놓고 설명한다.

###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실

선언문은 1919년 군사조직법을 창군 근거로 제시한다. 장제스(蔣介石)의 허락도 언급한다. 한중 협력을 통한 항일전 수행을 목표로 삼았다.

### 연구 해설에서 공통으로 제시하는 평가

창군은 임시정부가 이어 온 군대 편성 정책의 성과로 설명된다. 군사간부 양성과 동포 후원이 그 배경으로 제시된다. 총사령부 출범 이후의 병력 확충도 별도 과정으로 다룬다.

### 자료가 다르게 설명하는 부분

창설일은 해설에 따라 9월 15일 또는 17일로 서술된다. 우리역사넷 연대기는 선언문 발표를 기준으로 15일을 제시한다. 기념관 창군 해설은 성립전례식이 열린 17일을 제시한다. 두 사건의 날짜를 나누면 서술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허락도 승인 범위를 구분해야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역사넷 사료 해설은 원칙적 허락과 정식 인준을 구별한다. 선언문의 표현만으로 모든 협상이 끝났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확인한 자료만으로 이를 하나의 학계 논쟁으로 단정하지는 않는다. [우리역사넷 선언문 해설](https://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127_0005)

## 오늘날 이동사를 읽는 의미

이동사는 임시정부를 유지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인물의 결단 외에도 정부 조직과 현지 협력이 작용했다. 군사활동은 동포사회의 재정 지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유적을 이해할 때도 장소가 맡은 기능을 나누어야 한다. 정부 청사, 개인 피신처, 창군 행사장은 서로 다른 공간이다. 같은 시기의 유적이라도 보여 주는 활동은 다르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의 사이버기념관은 관련 연표와 유물을 함께 제시한다. [기념관 사이버 연표](https://www.nmkpg.go.kr/meta/timeline)

## 자주 묻는 질문

### 충칭에 도착한 뒤에야 창군 준비를 시작했나

창군 준비는 이동 시기부터 진행되었다. 군사간부 양성과 군사특파단 활동이 앞서 이루어졌다. 충칭에서는 그 준비를 바탕으로 총사령부가 출범했다.

### 광복군은 처음부터 큰 전투부대였나

창설 시점에 완성된 조직은 총사령부였다. 실제 부대를 갖추기 위한 모집과 훈련은 이어졌다. 창군 행사와 전력 확충은 별개의 단계다.

### 중국의 지원과 임시정부의 독자 창군은 모순인가

지원 확보와 지휘권 유지는 서로 다른 문제였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지원을 구하면서 자체 지휘권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지원 협상과 독자 창군 방침이 함께 나타났다.

### 이동 경로에 자싱이나 난징이 추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료가 정부 청사와 요인의 활동지를 함께 다루기 때문이다. 김구 등은 자싱에 피신했다. 전장 시기에는 여러 요인이 난징(南京)에 거주했다. 경로를 비교할 때는 무엇의 이동을 표시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 FAQ

###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의 배후 수색과 추적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정부 청사는 항저우로 옮겼고, 요인들은 여러 곳에 피신했다.

### 1932~1940년 임시정부의 주요 이동 경로는 무엇인가
주요 청사 이동은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순으로 정리된다. 개인의 피신처와 중간 경유지는 이 목록과 다를 수 있다.

### 임시정부는 언제 충칭에 정착했나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같은 달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열렸다.

### 광복군 창군에서 군사특파단은 어떤 일을 했나
군사특파단은 시안을 거점으로 화북 지역 한인을 모집하는 활동을 추진했다. 이 활동은 창설 이후 병력 확충의 기반이 되었다.

### 미주 동포의 모금은 창군에 어떻게 기여했나
미주 동포의 후원은 군대 조직을 추진할 재원을 뒷받침했다. 다만 군 운영비를 모두 충당하기는 어려워 중국 측의 재정 지원도 요청했다.

### 1940년 9월 15일과 9월 17일은 무엇이 다른가
9월 15일은 김구 명의의 선언문 발표일이다. 9월 17일은 충칭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열린 날이다.

### 광복군 창설 당시 병력과 부대가 모두 갖추어졌나
창설 당시 구성이 완료된 조직은 총사령부였다. 병력 모집과 훈련, 부대 확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중국과의 창군 협상에서 쟁점은 무엇이었나
광복군을 누가 지휘할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중국 측은 중국군 지휘 아래 둘 것을 요구했고, 임시정부는 자체 지휘권을 지키려 했다.

### 광복군이 충칭에서 창설된 뒤 시안으로 이동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안에는 군사특파단의 활동 기반이 있었다. 화북 지역 한인을 대상으로 모집과 선전 활동을 벌이기에도 유리했다.

## Sources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민국 임시정부](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한국광복군 창설과 초기 운영](https://www.nmkpg.go.kr/webzine/story/cn.do?rid=368)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광복군 선언문](https://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127_0005)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광복군](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3810)
-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10권 한국광복군 Ⅰ 해제](https://db.history.go.kr/id/ij_010_%241exp)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사이버기념관 연표와 유물](https://www.nmkpg.go.kr/meta/timeline)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광복군](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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