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_id":"zzsvd5wsyq","slug":"salsu-battle-612-eulji-mundeok-strategy-and-significance","locale":"ko","schema_type":"Article","category":"knowledge_base","category_name":"지식 베이스","title":"살수대첩 612년 을지문덕의 유인 전략과 의미","summary":"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가 수나라의 평양 진격 부대를 물리친 전투다. 을지문덕의 정찰과 유인, 철수 중 도하 공격을 중심으로 전개됐으며, 병력 수치와 수공설은 기록의 범위를 구분해 읽어야 한다.","sponsorship_disclosure":null,"affiliate_disclosure":null,"commerce_disclosure":null,"author":{"name":"인조이스 편집팀","url":"https://injoys.com/ko/about"},"key_points":["살수대첩은 612년 음력 7월 고구려가 살수에서 수나라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다.","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적진을 살핀 뒤 수나라군을 유인했다.","고구려군은 철수하는 수나라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후군을 공격했다.","『삼국사기』의 30만 5천 명과 2,700명은 각각 9군의 출발 병력과 요동성 귀환자 수다.","살수대첩은 612년 원정을 좌절시켰지만 이후 수나라의 침공까지 끝낸 것은 아니다."],"content_markdown":"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전투다. 을지문덕은 적군을 깊이 유인한 뒤 철수 중 살수를 건널 때 공격했다. 대규모 원정군의 평양 공략을 좌절시킨 승리로 기억된다.\n\n이 글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삼국사기』를 따르며 2026년 9월에 확인했다.\n\n## 살수대첩은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나\n\n살수대첩은 영양왕 23년인 612년 음력 7월에 벌어졌다. 살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 고구려 측 지휘관은 을지문덕이었다. 상대는 우중문과 우문술 등이 이끈 수나라의 평양 진격 부대였다.\n\n이 전투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벌인 전쟁의 한 부분이다. 수나라군 전체가 살수 한곳에 모여 싸운 것은 아니다. 요동성을 공격한 병력과 평양으로 향한 병력을 구분해야 한다. 전투의 기본 정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살수대첩 항목](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415)에서 확인된다.\n\n## 수나라 침공의 배경\n\n전쟁의 배경에는 동아시아 질서를 둘러싼 양국의 충돌이 있었다. 수나라는 589년 중국을 통일했다. 이후 주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려 했다. 고구려는 기존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키려는 입장이었다.\n\n598년 고구려는 요서를 먼저 공격했다. 이에 수 문제가 군대를 보냈으나 원정은 실패했다. 뒤를 이은 수 양제는 612년 직접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이 흐름은 [우리역사넷의 고구려·수 전쟁 해설](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c/printViewPopup.do?levelId=kc_i100400)에 정리돼 있다.\n\n고구려는 수도까지 이어지는 여러 공격을 받았다. 수나라 주력은 요동의 성들을 압박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평양으로 진격했다. 내호아가 지휘한 수나라 해군도 바다를 건너 접근했다.\n\n## 침공부터 철수까지의 연표\n\n살수대첩의 전개는 적진 정찰과 유인, 철수 중 공격으로 이어졌다. 아래 월 표기는 사료의 음력을 따른다. 양력 날짜로 바꾸지 않았다.\n\n| 시기 | 사건 | 출처 |\n| --- | --- | --- |\n| 589년 | 수나라의 중국 통일 | 우리역사넷 「고구려·수 전쟁」 |\n| 598년 | 고구려의 요서 공격과 수 문제의 원정 실패 | 우리역사넷 「고구려·수 전쟁」 |\n| 612년 | 수 양제의 대규모 고구려 침공 | 우리역사넷 「살수대첩」 |\n| 612년 음력 6월 | 을지문덕의 수나라 진영 정찰 |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 |\n| 612년 음력 7월 | 철수하던 수나라군을 살수에서 공격 |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 |\n| 613년 | 수나라 재침공 뒤 양현감의 반란으로 철수 | 우리역사넷 「고구려·수 전쟁」 |\n| 614년 | 수나라 재침공 뒤 고구려의 화친 요청으로 전쟁 마무리 | 우리역사넷 「고구려·수 전쟁」 |\n\n## 을지문덕의 정찰과 유인 전략\n\n### 거짓 항복으로 무엇을 확인했나\n\n『삼국사기』는 을지문덕의 적진 방문 목적을 정찰로 설명한다. 그는 왕명을 받고 항복하는 형식으로 수나라 진영에 들어갔다. 실제 목적은 상대 군대의 강점과 약점을 살피는 것이었다. 이는 [을지문덕 열전의 정찰 기사](https://db.history.go.kr/common/compareViewer.do?levelId=sg_044r_0020_0040\u0026type=ancient)에 명시돼 있다.\n\n수나라 지휘부는 을지문덕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유사룡의 반대로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오라는 요청에도 을지문덕은 응하지 않았다. 이후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고 기록돼 있다.\n\n### 많은 군량을 받고도 왜 굶주렸나\n\n보급 문제는 식량의 지급량과 실제 운반 능력 사이에서 발생했다. 9군은 출발할 때 100일치 식량을 받았다고 전한다. 병사들은 무기와 다른 군수품도 함께 운반해야 했다.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해 식량을 묻어 버린 사례가 기록돼 있다.\n\n따라서 식량을 지급했다는 사실만으로 보급 성공을 뜻하지 않는다. 평양까지 진격하는 동안 먹을 식량이 남아 있어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이 조건이 무너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9군의 작전상 제약으로 설명한다.\n\n### 패한 척 물러난 이유는 무엇인가\n\n을지문덕의 후퇴는 상대를 더 깊이 끌어들이는 유인 작전이었다. 우리역사넷은 하루 일곱 차례의 싸움을 의도적 패배로 설명한다. 수나라군은 전투에서 이기면서도 체력을 소모했다. 결국 평양 부근까지 진격한 병력은 보급난과 피로에 놓였다.\n\n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전쟁을 멈추라는 뜻을 담은 시를 보냈다. 다만 시 한 편이 퇴각을 결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군량 부족과 평양성 공략의 어려움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관련 설명은 [우리역사넷의 살수대첩 해설](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10\u0026levelId=kc_i101200)에 나온다.\n\n## 전환점은 철수와 도하 공격\n\n결정적인 전환점은 고구려군이 철수하는 적을 계속 압박한 데 있었다. 을지문덕은 사자를 보내 다시 항복을 제안했다. 수나라군이 돌아가면 고구려 왕의 황제 알현을 주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친 수나라 지휘부는 이를 명분으로 철수했다.\n\n『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은 이어진 공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n\n\u003e 을지문덕이 군사를 내어 사방에서 포위하여 습격하였다.\n\n수나라군은 방진을 유지하며 싸우면서 이동했다. 방진은 여러 방향의 공격에 대비한 대형이다. 살수에서 병력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후군을 공격했다. 뒤쪽 부대의 붕괴가 여러 부대로 번졌다고 기록돼 있다.\n\n전술적으로 보면 강을 건너는 중에는 부대가 나뉘기 쉽다. 이는 도하 시점의 취약성을 설명하는 해석이다. 사료가 직접 밝힌 공격 대상은 후군이다. 근거는 [을지문덕 열전의 살수 전투 기사](https://db.history.go.kr/common/compareViewer.do?levelId=sg_044r_0020_0110\u0026type=ancient)다.\n\n## 병력 수치와 전투 결과\n\n『삼국사기』의 수치는 평양으로 진격한 9군의 큰 패배를 보여준다. 그러나 출발 병력과 귀환자 수의 차이가 곧 전사자 수는 아니다. 두 수치가 가리키는 장소와 집계 범위를 구분해야 한다.\n\n| 기록된 수치 | 시기와 범위 | 해석할 때 주의할 점 |\n| --- | --- | --- |\n| 100만 명 | 612년 수나라 원정 동원 병력으로 전하는 수치 | 살수 전장에 모인 병력 수가 아님 |\n| 30만 5천 명 | 612년 9군이 처음 요하를 건널 때의 병력 | 평양 진격 부대의 출발 규모 |\n| 2,700명 | 612년 패전 뒤 요동성으로 돌아온 인원 | 원정군 전체의 생존자 수로 확대할 수 없음 |\n\n첫 수치는 우리역사넷의 살수대첩 해설에 제시돼 있다. (확인값 113만 3,800명의 군사와 그 배가 되는 군량 운반자 · 출처 contents.history.go.kr · 2026-09-23 확인) 뒤의 두 수치는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의 기록이다. (확인값 요하를 처음 건넌 9군 30만 5천 명, 요동성 귀환자 2,700명 · 출처 db.history.go.kr · 2026-09-23 확인) 고구려군의 정확한 병력과 피해 규모는 이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n\n살수대첩은 612년 수나라 원정의 실패를 결정지었다. 수 양제도 결국 군대를 물렸다. 그러나 수나라는 613년과 614년에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다. 따라서 이 승리를 양국 전쟁 전체의 즉각적인 종결로 볼 수는 없다.\n\n수나라의 몰락도 한 전투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반복된 원정은 국가의 부담을 키웠다. 대규모 토목공사와 내부 반란도 함께 작용했다. 이러한 배경은 우리역사넷의 고구려·수 전쟁 해설에서 확인된다.\n\n## 기록과 해석\n\n### 사료에 직접 적힌 내용\n\n『삼국사기』는 정찰과 유인, 철수 중 공격을 전한다. 그러나 612년 현장에서 작성된 보고서는 아니다. 김부식 등이 고려에서 1145년에 편찬한 역사서다. 편찬 시기는 [우리역사넷의 삼국사기 해설](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200340)에서 확인된다.\n\n###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n\n공공 역사 해설은 유인 작전과 보급난을 승패의 핵심으로 설명한다. 우리역사넷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공유하는 설명이다. 요동의 성들이 버틴 상황도 함께 고려한다. 을지문덕의 작전은 이 전쟁 전체의 조건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n\n### 수공설은 확인된 사실인가\n\n제방을 터뜨려 적을 휩쓸었다는 설명은 확정된 사실로 보기 어렵다. 『삼국사기』의 해당 대목에는 제방 파괴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석은 수공설의 근거가 된 후대 전승을 검토한다. 전승의 성립 시기와 제방 공사의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n\n따라서 강을 이용한 전투와 제방을 터뜨린 수공은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도하 중 공격이라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후자는 별도의 입증이 필요한 해석이다.\n\n## 같은 숫자가 여러 사서에 나오는 이유\n\n여러 역사서에 같은 수치가 있어도 독립된 증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후대 사서가 앞선 책의 내용을 인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석은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의 문장 관계를 설명한다. 일부 내용을 생략하거나 표현을 바꾸어 인용했다고 밝힌다.\n\n따라서 사서의 개수만 세어 숫자의 정확성을 판단하면 안 된다. 같은 수치가 어디에서 전해졌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를 통해 전투의 승패와 병력 통계의 정확도를 따로 판단할 수 있다.\n\n## 오늘날 살수대첩을 이해하는 의미\n\n살수대첩은 병력 규모만으로 전쟁 결과를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보급이 끊기면 많은 병력도 작전을 지속하기 어렵다. 지휘부의 판단과 성곽 방어도 전투의 조건을 바꾼다. 마지막 도하 공격은 그 앞선 과정과 연결돼 있다.\n\n역사 학습에서는 다음 내용을 구분해야 한다.\n\n- 전쟁과 전투: 고구려·수 전쟁 전체와 612년 살수 전투의 구분\n- 전체와 일부: 수나라 원정군과 평양 진격 9군의 구분\n- 기록과 재현: 사료에 적힌 공격과 후대 수공 이야기의 구분\n- 사건과 편찬: 612년의 전투와 고려시대 역사서의 구분\n\n## 자주 묻는 질문\n\n### 살수는 지금 어디인가\n\n살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 우리역사넷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이렇게 설명한다. 다만 강의 비정만으로 당시의 정확한 도하 지점까지 확정되지는 않는다.\n\n### 을지문덕의 출생과 생애는 알려져 있나\n\n을지문덕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도 그의 가계를 알 수 없다고 전한다. 후대 책에 나오는 출신지 설명은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다. 관련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을지문덕 항목](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69)에 정리돼 있다.\n\n### 수나라 군대와 수군은 같은 뜻인가\n\n이 글에서 수나라군은 수나라의 군대를 뜻한다. 수군은 문맥에 따라 배를 타고 싸우는 해군을 가리킨다. 내호아의 해군과 우중문·우문술의 육상 부대를 구분해야 한다.\n\n### 살수대첩 날짜를 양력 기념일로 쓸 수 있나\n\n음력 기록을 그대로 양력 기념일로 쓰면 안 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전투 시기를 612년 음력 7월로 표시한다. 이 글은 이를 양력 날짜로 변환하지 않는다.","content_html":"\u003cp\u003e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전투다. 을지문덕은 적군을 깊이 유인한 뒤 철수 중 살수를 건널 때 공격했다. 대규모 원정군의 평양 공략을 좌절시킨 승리로 기억된다.\u003c/p\u003e\n\u003cp\u003e이 글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삼국사기』를 따르며 2026년 9월에 확인했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82%B4%EC%88%98%EB%8C%80%EC%B2%A9%EC%9D%80-%EC%96%B8%EC%A0%9C-%EC%96%B4%EB%94%94%EC%97%90%EC%84%9C-%EC%9D%BC%EC%96%B4%EB%82%AC%EB%82%98\" class=\"anchor\" id=\"살수대첩은-언제-어디에서-일어났나\"\u003e\u003c/a\u003e살수대첩은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나\u003c/h2\u003e\n\u003cp\u003e살수대첩은 영양왕 23년인 612년 음력 7월에 벌어졌다. 살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 고구려 측 지휘관은 을지문덕이었다. 상대는 우중문과 우문술 등이 이끈 수나라의 평양 진격 부대였다.\u003c/p\u003e\n\u003cp\u003e이 전투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벌인 전쟁의 한 부분이다. 수나라군 전체가 살수 한곳에 모여 싸운 것은 아니다. 요동성을 공격한 병력과 평양으로 향한 병력을 구분해야 한다. 전투의 기본 정보는 \u003ca h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415\"\u003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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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612년 음력 6월\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u003e을지문덕의 수나라 진영 정찰\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612년 음력 7월\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u003e철수하던 수나라군을 살수에서 공격\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613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u003e수나라 재침공 뒤 양현감의 반란으로 철수\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우리역사넷 「고구려·수 전쟁」\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시기\"\u003e614년\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사건\"\u003e수나라 재침공 뒤 고구려의 화친 요청으로 전쟁 마무리\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출처\"\u003e우리역사넷 「고구려·수 전쟁」\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9D%84%EC%A7%80%EB%AC%B8%EB%8D%95%EC%9D%98-%EC%A0%95%EC%B0%B0%EA%B3%BC-%EC%9C%A0%EC%9D%B8-%EC%A0%84%EB%9E%B5\" class=\"anchor\" id=\"을지문덕의-정찰과-유인-전략\"\u003e\u003c/a\u003e을지문덕의 정찰과 유인 전략\u003c/h2\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A%B1%B0%EC%A7%93-%ED%95%AD%EB%B3%B5%EC%9C%BC%EB%A1%9C-%EB%AC%B4%EC%97%87%EC%9D%84-%ED%99%95%EC%9D%B8%ED%96%88%EB%82%98\" class=\"anchor\" id=\"거짓-항복으로-무엇을-확인했나\"\u003e\u003c/a\u003e거짓 항복으로 무엇을 확인했나\u003c/h3\u003e\n\u003cp\u003e『삼국사기』는 을지문덕의 적진 방문 목적을 정찰로 설명한다. 그는 왕명을 받고 항복하는 형식으로 수나라 진영에 들어갔다. 실제 목적은 상대 군대의 강점과 약점을 살피는 것이었다. 이는 \u003ca href=\"https://db.history.go.kr/common/compareViewer.do?levelId=sg_044r_0020_0040\u0026amp;type=ancient\"\u003e을지문덕 열전의 정찰 기사\u003c/a\u003e에 명시돼 있다.\u003c/p\u003e\n\u003cp\u003e수나라 지휘부는 을지문덕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유사룡의 반대로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오라는 요청에도 을지문덕은 응하지 않았다. 이후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고 기록돼 있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B%A7%8E%EC%9D%80-%EA%B5%B0%EB%9F%89%EC%9D%84-%EB%B0%9B%EA%B3%A0%EB%8F%84-%EC%99%9C-%EA%B5%B6%EC%A3%BC%EB%A0%B8%EB%82%98\" class=\"anchor\" id=\"많은-군량을-받고도-왜-굶주렸나\"\u003e\u003c/a\u003e많은 군량을 받고도 왜 굶주렸나\u003c/h3\u003e\n\u003cp\u003e보급 문제는 식량의 지급량과 실제 운반 능력 사이에서 발생했다. 9군은 출발할 때 100일치 식량을 받았다고 전한다. 병사들은 무기와 다른 군수품도 함께 운반해야 했다.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해 식량을 묻어 버린 사례가 기록돼 있다.\u003c/p\u003e\n\u003cp\u003e따라서 식량을 지급했다는 사실만으로 보급 성공을 뜻하지 않는다. 평양까지 진격하는 동안 먹을 식량이 남아 있어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이 조건이 무너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9군의 작전상 제약으로 설명한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D%8C%A8%ED%95%9C-%EC%B2%99-%EB%AC%BC%EB%9F%AC%EB%82%9C-%EC%9D%B4%EC%9C%A0%EB%8A%94-%EB%AC%B4%EC%97%87%EC%9D%B8%EA%B0%80\" class=\"anchor\" id=\"패한-척-물러난-이유는-무엇인가\"\u003e\u003c/a\u003e패한 척 물러난 이유는 무엇인가\u003c/h3\u003e\n\u003cp\u003e을지문덕의 후퇴는 상대를 더 깊이 끌어들이는 유인 작전이었다. 우리역사넷은 하루 일곱 차례의 싸움을 의도적 패배로 설명한다. 수나라군은 전투에서 이기면서도 체력을 소모했다. 결국 평양 부근까지 진격한 병력은 보급난과 피로에 놓였다.\u003c/p\u003e\n\u003cp\u003e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전쟁을 멈추라는 뜻을 담은 시를 보냈다. 다만 시 한 편이 퇴각을 결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군량 부족과 평양성 공략의 어려움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관련 설명은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10\u0026amp;levelId=kc_i101200\"\u003e우리역사넷의 살수대첩 해설\u003c/a\u003e에 나온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A0%84%ED%99%98%EC%A0%90%EC%9D%80-%EC%B2%A0%EC%88%98%EC%99%80-%EB%8F%84%ED%95%98-%EA%B3%B5%EA%B2%A9\" class=\"anchor\" id=\"전환점은-철수와-도하-공격\"\u003e\u003c/a\u003e전환점은 철수와 도하 공격\u003c/h2\u003e\n\u003cp\u003e결정적인 전환점은 고구려군이 철수하는 적을 계속 압박한 데 있었다. 을지문덕은 사자를 보내 다시 항복을 제안했다. 수나라군이 돌아가면 고구려 왕의 황제 알현을 주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친 수나라 지휘부는 이를 명분으로 철수했다.\u003c/p\u003e\n\u003cp\u003e『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은 이어진 공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u003c/p\u003e\n\u003cblockquote\u003e\n\u003cp\u003e을지문덕이 군사를 내어 사방에서 포위하여 습격하였다.\u003c/p\u003e\n\u003c/blockquote\u003e\n\u003cp\u003e수나라군은 방진을 유지하며 싸우면서 이동했다. 방진은 여러 방향의 공격에 대비한 대형이다. 살수에서 병력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후군을 공격했다. 뒤쪽 부대의 붕괴가 여러 부대로 번졌다고 기록돼 있다.\u003c/p\u003e\n\u003cp\u003e전술적으로 보면 강을 건너는 중에는 부대가 나뉘기 쉽다. 이는 도하 시점의 취약성을 설명하는 해석이다. 사료가 직접 밝힌 공격 대상은 후군이다. 근거는 \u003ca href=\"https://db.history.go.kr/common/compareViewer.do?levelId=sg_044r_0020_0110\u0026amp;type=ancient\"\u003e을지문덕 열전의 살수 전투 기사\u003c/a\u003e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B%B3%91%EB%A0%A5-%EC%88%98%EC%B9%98%EC%99%80-%EC%A0%84%ED%88%AC-%EA%B2%B0%EA%B3%BC\" class=\"anchor\" id=\"병력-수치와-전투-결과\"\u003e\u003c/a\u003e병력 수치와 전투 결과\u003c/h2\u003e\n\u003cp\u003e『삼국사기』의 수치는 평양으로 진격한 9군의 큰 패배를 보여준다. 그러나 출발 병력과 귀환자 수의 차이가 곧 전사자 수는 아니다. 두 수치가 가리키는 장소와 집계 범위를 구분해야 한다.\u003c/p\u003e\n\u003cdiv class=\"overflow-x-auto\"\u003e\u003ctable\u003e\n\u003cthead\u003e\n\u003ctr\u003e\n\u003cth\u003e기록된 수치\u003c/th\u003e\n\u003cth\u003e시기와 범위\u003c/th\u003e\n\u003cth\u003e해석할 때 주의할 점\u003c/th\u003e\n\u003c/tr\u003e\n\u003c/thead\u003e\n\u003ctbody\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기록된 수치\"\u003e100만 명\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시기와 범위\"\u003e612년 수나라 원정 동원 병력으로 전하는 수치\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해석할 때 주의할 점\"\u003e살수 전장에 모인 병력 수가 아님\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기록된 수치\"\u003e30만 5천 명\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시기와 범위\"\u003e612년 9군이 처음 요하를 건널 때의 병력\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해석할 때 주의할 점\"\u003e평양 진격 부대의 출발 규모\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r\u003e\n\u003ctd data-label=\"기록된 수치\"\u003e2,700명\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시기와 범위\"\u003e612년 패전 뒤 요동성으로 돌아온 인원\u003c/td\u003e\n\u003ctd data-label=\"해석할 때 주의할 점\"\u003e원정군 전체의 생존자 수로 확대할 수 없음\u003c/td\u003e\n\u003c/tr\u003e\n\u003c/tbody\u003e\n\u003c/table\u003e\u003c/div\u003e\n\u003cp\u003e첫 수치는 우리역사넷의 살수대첩 해설에 제시돼 있다. (확인값 113만 3,800명의 군사와 그 배가 되는 군량 운반자 · 출처 contents.history.go.kr · 2026-09-23 확인) 뒤의 두 수치는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의 기록이다. (확인값 요하를 처음 건넌 9군 30만 5천 명, 요동성 귀환자 2,700명 · 출처 db.history.go.kr · 2026-09-23 확인) 고구려군의 정확한 병력과 피해 규모는 이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u003c/p\u003e\n\u003cp\u003e살수대첩은 612년 수나라 원정의 실패를 결정지었다. 수 양제도 결국 군대를 물렸다. 그러나 수나라는 613년과 614년에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다. 따라서 이 승리를 양국 전쟁 전체의 즉각적인 종결로 볼 수는 없다.\u003c/p\u003e\n\u003cp\u003e수나라의 몰락도 한 전투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반복된 원정은 국가의 부담을 키웠다. 대규모 토목공사와 내부 반란도 함께 작용했다. 이러한 배경은 우리역사넷의 고구려·수 전쟁 해설에서 확인된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A%B8%B0%EB%A1%9D%EA%B3%BC-%ED%95%B4%EC%84%9D\" class=\"anchor\" id=\"기록과-해석\"\u003e\u003c/a\u003e기록과 해석\u003c/h2\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82%AC%EB%A3%8C%EC%97%90-%EC%A7%81%EC%A0%91-%EC%A0%81%ED%9E%8C-%EB%82%B4%EC%9A%A9\" class=\"anchor\" id=\"사료에-직접-적힌-내용\"\u003e\u003c/a\u003e사료에 직접 적힌 내용\u003c/h3\u003e\n\u003cp\u003e『삼국사기』는 정찰과 유인, 철수 중 공격을 전한다. 그러나 612년 현장에서 작성된 보고서는 아니다. 김부식 등이 고려에서 1145년에 편찬한 역사서다. 편찬 시기는 \u003ca href=\"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200340\"\u003e우리역사넷의 삼국사기 해설\u003c/a\u003e에서 확인된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A%B3%B5%ED%86%B5%EC%A0%81%EC%9C%BC%EB%A1%9C-%EB%B0%9B%EC%95%84%EB%93%A4%EC%97%AC%EC%A7%80%EB%8A%94-%EC%84%A4%EB%AA%85\" class=\"anchor\" id=\"공통적으로-받아들여지는-설명\"\u003e\u003c/a\u003e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u003c/h3\u003e\n\u003cp\u003e공공 역사 해설은 유인 작전과 보급난을 승패의 핵심으로 설명한다. 우리역사넷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공유하는 설명이다. 요동의 성들이 버틴 상황도 함께 고려한다. 을지문덕의 작전은 이 전쟁 전체의 조건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88%98%EA%B3%B5%EC%84%A4%EC%9D%80-%ED%99%95%EC%9D%B8%EB%90%9C-%EC%82%AC%EC%8B%A4%EC%9D%B8%EA%B0%80\" class=\"anchor\" id=\"수공설은-확인된-사실인가\"\u003e\u003c/a\u003e수공설은 확인된 사실인가\u003c/h3\u003e\n\u003cp\u003e제방을 터뜨려 적을 휩쓸었다는 설명은 확정된 사실로 보기 어렵다. 『삼국사기』의 해당 대목에는 제방 파괴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석은 수공설의 근거가 된 후대 전승을 검토한다. 전승의 성립 시기와 제방 공사의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u003c/p\u003e\n\u003cp\u003e따라서 강을 이용한 전투와 제방을 터뜨린 수공은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도하 중 공격이라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후자는 별도의 입증이 필요한 해석이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A%B0%99%EC%9D%80-%EC%88%AB%EC%9E%90%EA%B0%80-%EC%97%AC%EB%9F%AC-%EC%82%AC%EC%84%9C%EC%97%90-%EB%82%98%EC%98%A4%EB%8A%94-%EC%9D%B4%EC%9C%A0\" class=\"anchor\" id=\"같은-숫자가-여러-사서에-나오는-이유\"\u003e\u003c/a\u003e같은 숫자가 여러 사서에 나오는 이유\u003c/h2\u003e\n\u003cp\u003e여러 역사서에 같은 수치가 있어도 독립된 증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후대 사서가 앞선 책의 내용을 인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석은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의 문장 관계를 설명한다. 일부 내용을 생략하거나 표현을 바꾸어 인용했다고 밝힌다.\u003c/p\u003e\n\u003cp\u003e따라서 사서의 개수만 세어 숫자의 정확성을 판단하면 안 된다. 같은 수치가 어디에서 전해졌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를 통해 전투의 승패와 병력 통계의 정확도를 따로 판단할 수 있다.\u003c/p\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98%A4%EB%8A%98%EB%82%A0-%EC%82%B4%EC%88%98%EB%8C%80%EC%B2%A9%EC%9D%84-%EC%9D%B4%ED%95%B4%ED%95%98%EB%8A%94-%EC%9D%98%EB%AF%B8\" class=\"anchor\" id=\"오늘날-살수대첩을-이해하는-의미\"\u003e\u003c/a\u003e오늘날 살수대첩을 이해하는 의미\u003c/h2\u003e\n\u003cp\u003e살수대첩은 병력 규모만으로 전쟁 결과를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보급이 끊기면 많은 병력도 작전을 지속하기 어렵다. 지휘부의 판단과 성곽 방어도 전투의 조건을 바꾼다. 마지막 도하 공격은 그 앞선 과정과 연결돼 있다.\u003c/p\u003e\n\u003cp\u003e역사 학습에서는 다음 내용을 구분해야 한다.\u003c/p\u003e\n\u003cul\u003e\n\u003cli\u003e전쟁과 전투: 고구려·수 전쟁 전체와 612년 살수 전투의 구분\u003c/li\u003e\n\u003cli\u003e전체와 일부: 수나라 원정군과 평양 진격 9군의 구분\u003c/li\u003e\n\u003cli\u003e기록과 재현: 사료에 적힌 공격과 후대 수공 이야기의 구분\u003c/li\u003e\n\u003cli\u003e사건과 편찬: 612년의 전투와 고려시대 역사서의 구분\u003c/li\u003e\n\u003c/ul\u003e\n\u003ch2\u003e\n\u003ca href=\"#%EC%9E%90%EC%A3%BC-%EB%AC%BB%EB%8A%94-%EC%A7%88%EB%AC%B8\" class=\"anchor\" id=\"자주-묻는-질문\"\u003e\u003c/a\u003e자주 묻는 질문\u003c/h2\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82%B4%EC%88%98%EB%8A%94-%EC%A7%80%EA%B8%88-%EC%96%B4%EB%94%94%EC%9D%B8%EA%B0%80\" class=\"anchor\" id=\"살수는-지금-어디인가\"\u003e\u003c/a\u003e살수는 지금 어디인가\u003c/h3\u003e\n\u003cp\u003e살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 우리역사넷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이렇게 설명한다. 다만 강의 비정만으로 당시의 정확한 도하 지점까지 확정되지는 않는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9D%84%EC%A7%80%EB%AC%B8%EB%8D%95%EC%9D%98-%EC%B6%9C%EC%83%9D%EA%B3%BC-%EC%83%9D%EC%95%A0%EB%8A%94-%EC%95%8C%EB%A0%A4%EC%A0%B8-%EC%9E%88%EB%82%98\" class=\"anchor\" id=\"을지문덕의-출생과-생애는-알려져-있나\"\u003e\u003c/a\u003e을지문덕의 출생과 생애는 알려져 있나\u003c/h3\u003e\n\u003cp\u003e을지문덕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도 그의 가계를 알 수 없다고 전한다. 후대 책에 나오는 출신지 설명은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다. 관련 내용은 \u003ca h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69\"\u003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을지문덕 항목\u003c/a\u003e에 정리돼 있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88%98%EB%82%98%EB%9D%BC-%EA%B5%B0%EB%8C%80%EC%99%80-%EC%88%98%EA%B5%B0%EC%9D%80-%EA%B0%99%EC%9D%80-%EB%9C%BB%EC%9D%B8%EA%B0%80\" class=\"anchor\" id=\"수나라-군대와-수군은-같은-뜻인가\"\u003e\u003c/a\u003e수나라 군대와 수군은 같은 뜻인가\u003c/h3\u003e\n\u003cp\u003e이 글에서 수나라군은 수나라의 군대를 뜻한다. 수군은 문맥에 따라 배를 타고 싸우는 해군을 가리킨다. 내호아의 해군과 우중문·우문술의 육상 부대를 구분해야 한다.\u003c/p\u003e\n\u003ch3\u003e\n\u003ca href=\"#%EC%82%B4%EC%88%98%EB%8C%80%EC%B2%A9-%EB%82%A0%EC%A7%9C%EB%A5%BC-%EC%96%91%EB%A0%A5-%EA%B8%B0%EB%85%90%EC%9D%BC%EB%A1%9C-%EC%93%B8-%EC%88%98-%EC%9E%88%EB%82%98\" class=\"anchor\" id=\"살수대첩-날짜를-양력-기념일로-쓸-수-있나\"\u003e\u003c/a\u003e살수대첩 날짜를 양력 기념일로 쓸 수 있나\u003c/h3\u003e\n\u003cp\u003e음력 기록을 그대로 양력 기념일로 쓰면 안 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전투 시기를 612년 음력 7월로 표시한다. 이 글은 이를 양력 날짜로 변환하지 않는다.\u003c/p\u003e\n","tags":["고구려","역사 해석"],"faqs":[{"question":"살수대첩은 언제 일어났나?","answer":"살수대첩은 고구려 영양왕 23년인 612년 음력 7월에 벌어졌다. 이 날짜를 양력 7월로 바꾸어 적으면 안 된다."},{"question":"살수대첩의 장소는 어디인가?","answer":"살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청천강으로 본다. 강의 위치와 당시의 정확한 도하 지점은 구분해야 한다."},{"question":"을지문덕은 왜 거짓으로 항복했나?","answer":"『삼국사기』는 적진 방문의 목적을 수나라군의 허실 파악으로 설명한다. 이후 사자를 통한 항복 제안은 수나라군의 철수 결정과 연결된다."},{"question":"을지문덕의 유인 전략은 어떻게 작동했나?","answer":"고구려군은 패한 척 물러나며 수나라군을 깊이 유인했다. 진격한 부대는 식량 부족과 피로에 놓였다. 철수할 때는 고구려군의 추격을 받았다."},{"question":"살수대첩은 제방을 터뜨린 수공 작전인가?","answer":"제방을 터뜨렸다는 설명은 확정된 사실로 보기 어렵다. 『삼국사기』는 수나라군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후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한다."},{"question":"30만 5천 명 중 2,700명만 돌아왔다는 기록은 무엇을 뜻하나?","answer":"『삼국사기』에서 30만 5천 명은 요하를 건넌 9군의 병력이다. 2,700명은 패전 뒤 요동성으로 돌아온 인원이다. 두 수치의 차이를 모두 전사자로 계산할 수는 없다."},{"question":"살수대첩으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끝났나?","answer":"612년 원정은 실패했지만 수나라는 613년과 614년에 다시 침공했다. 살수대첩은 양국 전쟁 전체의 종결과 구분해야 한다."},{"question":"을지문덕의 출생연도와 출신지는 확인됐나?","answer":"을지문덕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는 가계를 알 수 없다고 전한다. 후대 기록의 출신지 설명도 확정된 사실로 보기 어렵다."}],"sources":[{"url":"https://db.history.go.kr/common/compareViewer.do?levelId=sg_044r_0020_0040\u0026type=ancient","title":"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의 허실을 염탐하다","type":"source"},{"url":"https://db.history.go.kr/common/compareViewer.do?levelId=sg_044r_0020_0110\u0026type=ancient","title":"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을 거두다 및 주석","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code=kc_age_10\u0026levelId=kc_i101200","title":"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살수대첩","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c/printViewPopup.do?levelId=kc_i100400","title":"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고구려·수 전쟁","type":"source"},{"url":"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200340","title":"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삼국사기","type":"source"},{"url":"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415","title":"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살수대첩","type":"source"},{"url":"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969","title":"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지문덕","type":"source"}],"images":[{"id":1474,"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jE0MjAsInB1ciI6ImJsb2JfaWQifX0=--b3c68be1a8144a0c17155080b1f7e1dfc9e33da4/ai-f837ad74.webp","is_representative":true,"generation_method":"ai_infographic","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visible_locales":["ko"],"translations":{"ko":{"alt":"을지문덕의 유인 전략, 수나라군의 철수와 살수 도하 공격, 병력 수치와 기록 해석을 정리한 인포그래픽","caption":"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적진을 정찰하고 수나라군을 유인한 뒤 도하 중인 후군을 공격했다.","description":null},"en":{"alt":"Infographic tracing Eulji Mundeok’s lure, the Sui retreat, Salsu crossing attack and recorded troop figures","caption":"Eulji Mundeok used a false surrender to scout and lure the Sui army, then attacked its rear during the crossing.","description":null},"ja":{"alt":"乙支文徳の誘引策、隋軍の撤退と薩水渡河攻撃、兵力記録の解釈をまとめたインフォグラフィック","caption":"乙支文徳は偽りの降伏で敵陣を偵察して隋軍を誘い、渡河中の後軍を攻撃した。","description":null},"es":{"alt":"Infografía sobre la maniobra de Eulji Mundeok, la retirada de Sui, el ataque en Salsu y las cifras registradas","caption":"Eulji Mundeok fingió rendirse para reconocer y atraer al ejército de Sui, y atacó su retaguardia durante el cruce.","description":null},"id":{"alt":"Infografik strategi pancingan Eulji Mundeok, mundurnya pasukan Sui, serangan di Salsu, dan catatan jumlah pasukan","caption":"Eulji Mundeok berpura-pura menyerah untuk mengintai dan memancing pasukan Sui, lalu menyerang barisan belakang saat menyeberang.","description":null},"pt":{"alt":"Infográfico sobre a estratégia de Eulji Mundeok, a retirada de Sui, o ataque no Salsu e os efetivos registrados","caption":"Eulji Mundeok simulou rendição para reconhecer e atrair o exército Sui, atacando a retaguarda durante a travessia.","description":null},"zh-hant":{"alt":"整理乙支文德誘敵策略、隋軍撤退、薩水渡河攻擊與兵力記載解讀的資訊圖表","caption":"乙支文德以詐降偵察並引誘隋軍，待其渡河時攻擊後軍。","description":null},"de":{"alt":"Infografik zu Eulji Mundeoks Lockstrategie, dem Sui-Rückzug, dem Angriff am Salsu und überlieferten Truppenzahlen","caption":"Eulji Mundeok täuschte eine Kapitulation vor, erkundete und lockte das Sui-Heer und griff beim Übergang dessen Nachhut an.","description":null}}},{"id":1472,"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jE0MDgsInB1ciI6ImJsb2JfaWQifX0=--e4e7e6a542cd0912236dbe5e131d4db03a148002/ai-7f340824.webp","is_representative":false,"generation_method":"ai_semi","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translations":{"ko":{"alt":"강가의 수나라 군영에서 보급품과 말 사이를 호위받으며 걷는 고구려 사신 을지문덕","caption":"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적진을 살핀 뒤 수나라군을 유인했다.","description":null},"en":{"alt":"Goguryeo envoy Eulji Mundeok escorted through a riverside Sui camp filled with supplies and horses","caption":"Eulji Mundeok used a false surrender to scout the enemy camp before luring the Sui army onward.","description":null},"ja":{"alt":"川辺の隋軍陣営で物資や馬の間を護衛されて進む高句麗の使者、乙支文徳","caption":"乙支文徳は偽りの降伏で敵陣を探った後、隋軍を誘い込んだ。","description":null},"es":{"alt":"El enviado de Goguryeo Eulji Mundeok escoltado por un campamento sui junto al río","caption":"Eulji Mundeok fingió rendirse para inspeccionar el campamento enemigo y después atraer al ejército sui.","description":null},"id":{"alt":"Utusan Goguryeo Eulji Mundeok dikawal melintasi perkemahan Sui di tepi sungai","caption":"Eulji Mundeok berpura-pura menyerah untuk mengintai kubu musuh sebelum memancing pasukan Sui.","description":null},"pt":{"alt":"O emissário de Goguryeo Eulji Mundeok escoltado por um acampamento sui à beira do rio","caption":"Eulji Mundeok simulou rendição para sondar o campo inimigo antes de atrair o exército sui.","description":null},"zh-hant":{"alt":"高句麗使者乙支文德在河畔隋軍營地中受護送，周圍遍布軍需與馬匹","caption":"乙支文德以詐降探查敵營，隨後誘引隋軍深入。","description":null},"de":{"alt":"Goguryeo-Gesandter Eulji Mundeok wird durch ein Sui-Lager am Fluss eskortiert","caption":"Eulji Mundeok täuschte seine Kapitulation vor, kundschaftete das feindliche Lager aus und lockte das Sui-Heer weiter.","description":null}}},{"id":1473,"url":"https://injoys.com/rails/active_storage/blobs/proxy/eyJfcmFpbHMiOnsiZGF0YSI6MjE0MTQsInB1ciI6ImJsb2JfaWQifX0=--3948d79169c3ca7abe14348930f17bb1946d6551/ai-eed5fed6.webp","is_representative":false,"generation_method":"ai_semi","license":"ai_generated","mime_type":"image/webp","width":1536,"height":1024,"translations":{"ko":{"alt":"살수를 건너는 수나라 퇴각군과 강가에서 방진을 친 후군을 향해 산비탈을 내려오는 고구려군","caption":"고구려군은 퇴각하던 수나라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후군을 공격했다.","description":null},"en":{"alt":"Goguryeo troops descend wooded slopes toward the Sui rear guard as the retreating column crosses a shallow river","caption":"Goguryeo attacked the rear guard when the retreating Sui army was halfway across the Salsu.","description":null},"ja":{"alt":"浅い川を渡る隋の退却軍と岸辺で防御陣を組む後軍へ、山腹から迫る高句麗軍","caption":"高句麗軍は、退却する隋軍が薩水を半ば渡った時に後軍を攻撃した。","description":null},"es":{"alt":"Tropas de Goguryeo bajan por laderas boscosas hacia la retaguardia sui mientras la columna cruza un río","caption":"Goguryeo atacó la retaguardia cuando el ejército sui en retirada había cruzado la mitad del Salsu.","description":null},"id":{"alt":"Pasukan Goguryeo menuruni lereng berhutan menuju barisan belakang Sui yang mundur menyeberangi sungai dangkal","caption":"Goguryeo menyerang barisan belakang ketika pasukan Sui yang mundur baru separuh menyeberangi Salsu.","description":null},"pt":{"alt":"Tropas de Goguryeo descem encostas arborizadas rumo à retaguarda sui enquanto a coluna atravessa um rio raso","caption":"Goguryeo atacou a retaguarda quando o exército sui em retirada estava a meio da travessia do Salsu.","description":null},"zh-hant":{"alt":"隋軍撤退隊伍渡過淺河，高句麗軍從林木覆蓋的山坡逼近岸邊結陣的後軍","caption":"高句麗軍趁撤退的隋軍渡過薩水一半時攻擊其後軍。","description":null},"de":{"alt":"Goguryeo-Truppen steigen bewaldete Hänge zur Nachhut der Sui hinab, während der Rückzug einen flachen Fluss quert","caption":"Goguryeo griff die Nachhut an, als das abziehende Sui-Heer den Salsu zur Hälfte überquert hatte.","description":null}}}],"published_at":"2026-09-23T13:07:21+09:00","updated_at":"2026-09-23T13:07:21+09:00","license":"cc_by","translation_status":"original","available_locales":["ko","en","ja","es"],"data_locales":["ko","en","ja","es","id","pt","zh-hant","de"],"url":"https://injoys.com/ko/articles/salsu-battle-612-eulji-mundeok-strategy-and-signific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