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투자·비즈

한국 화폐 역사: 광복 후 한국은행권이 탄생하기까지

by 나이크 (injoys.com) 2025. 8. 16.
반응형

화폐로 보는 경제 주권의 역사

지갑 속 만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세요. 한국은행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죠. 당연하게 여기는 이 한국은행권이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실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상평통보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 조선은행권을 거쳐 오늘날 한국은행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화폐의 역사는 곧 경제 주권을 지키고 되찾으려 했던 치열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특히 광복 전후 시기는 화폐 제도가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때였어요.

일제강점기, 빼앗긴 화폐 발행권 

제일은행권의 강제 유통

19세기 말 조선은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일본의 경제 침탈로 좌절됐어요. 일본은 자국의 반관반민 은행인 제일은행을 앞세워 조선의 화폐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제일은행은 1902년부터 조선 정부와 아무런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제일은행권을 발행했어요. 당시 많은 조선 상인들이 제일은행권 사용을 거부하는 운동을 벌였지만, 일제의 압력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일제는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을 단행했습니다. 낡은 화폐를 정리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전통 화폐를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시키려는 음모였어요. 엽전이나 백동화 같은 조선 화폐를 제일은행권으로 교환하게 했는데, 환율을 터무니없이 불리하게 책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상인이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파산했어요. 게다가 조선에 있던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일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화폐정리사업은 단순한 통화 개혁이 아니라 조선 경제를 일본에 완전히 종속시키는 첫걸음이었던 셈이죠.

조선은행 설립과 경제 종속 

1911년 일제는 조선은행법을 제정하고 식민지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이름은 조선은행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통제하는 기관이었어요. 총재는 일본인이 맡았고, 주요 결정은 모두 일본 정부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은행권은 겉보기에는 일본은행권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였어요. 1대 1의 고정 환율로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다고 선전했죠.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일본이 필요할 때마다 마음대로 통화량을 늘리거나 줄였고, 이는 조선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어요.

더욱 분통터지는 일은 조선은행권의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고유의 문화나 역사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일본풍 디자인을 사용했어요. 심지어 100원권에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대흑천상이라는 수호신을 그려넣기도 했습니다. 화폐를 통해 정신적으로도 일본에 동화시키려 했던 거예요.

반응형

광복 직후의 화폐 대혼란

세 가지 화폐의 공존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화폐 문제는 오히려 더 복잡해졌어요. 당장 우리만의 화폐를 만들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복 직후 시장에는 세 종류의 화폐가 뒤섞여 유통됐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쓰던 조선은행권, 패전 후 일본이 남기고 간 일본 화폐, 그리고 미군정이 긴급히 발행한 군정화폐가 그것이었어요. 각 화폐마다 가치가 달랐고, 환율도 수시로 변했습니다.

이런 혼란을 틈타 환치기가 성행했어요. 화폐 간 환율 차이를 이용해 부당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선량한 시민들만 피해를 입었습니다. 시장에서는 어떤 돈을 받아야 할지, 물건값을 얼마로 매겨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어요.

인플레이션과 경제 혼란

설상가상으로 미군정은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화폐를 찍어냈습니다. 1945년 8월 말 79억 9천만 원이던 화폐 발행액이 그해 연말에는 87억 6천만 원으로 급증했어요. 불과 4개월 만에 거의 10억 원이 늘어난 겁니다.

당연히 물가는 폭등했습니다. 쌀 한 가마니 값이 하루가 다르게 올랐고, 아침에 산 물건이 저녁에는 두 배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어요. 화폐의 가치는 종잇조각 수준으로 떨어졌고,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제 혼란은 광복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일제로부터는 해방됐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자립하지 못한 상태였던 거죠.

한국은행 설립과 첫 한국은행권

전쟁 중에 태어난 우리 돈

정부는 진정한 경제 독립을 위해 독자적인 중앙은행 설립을 서둘렀습니다. 그 결과 1950년 6월 12일, 마침내 한국은행이 문을 열었어요. 조선은행은 공식 해산됐고, 화폐 발행권도 한국은행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요. 한국은행이 설립된 지 불과 13일 만인 6월 25일, 전쟁이 터졌습니다. 막 태어난 한국은행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련에 직면하게 됐어요.

전쟁 수행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한국은행이 보유한 현금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국내에는 화폐를 인쇄할 시설도 없었어요. 다급해진 정부는 일본에 화폐 제작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립국가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일본 대장성 인쇄국은 열흘 만에 1천원권 152억 원어치와 100원권 2억 3천만 원어치를 인쇄했습니다. 1천원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100원권에는 광화문 사진이 들어갔어요. 비록 일본에서 제작됐지만, 도안만큼은 우리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최초의 한국은행권은 1950년 7월, 미군 수송기를 통해 대구로 운반돼 유통되기 시작했어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우리 돈이었지만, 그 의미는 남달랐습니다. 비로소 우리만의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를 갖게 된 거니까요.

한국조폐공사의 출범

최초의 한국은행권이 일본에서 제작된 것은 뼈아픈 현실이었습니다. 진정한 화폐 주권을 확립하려면 우리 손으로 직접 화폐를 만들 수 있어야 했어요.

1951년 10월 1일, 드디어 한국조폐공사가 설립됐습니다. 부산 영도구에 임시 공장을 세우고 화폐 제조를 시작했어요. 비록 시설은 열악했지만, 우리 기술자들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한국조폐공사가 처음 만든 것은 10원 지폐였어요. 이후 차츰 기술력을 높여가며 다양한 액면의 화폐를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1953년 휴전 이후에는 서울로 이전해 본격적인 화폐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됐어요.

FAQ: 한국 화폐 역사 궁금증 해결

Q1. 광복 후 왜 바로 한국은행권을 만들지 못했나요?

A1. 광복 직후에는 화폐를 제조할 인쇄 시설이 전무했고, 새로운 화폐 제도를 설계할 전문 인력도 부족했어요. 또한 미군정 시기에는 정치적 독립도 완전하지 않아 독자적인 중앙은행 설립이 어려웠습니다. 정부 수립 후에야 한국은행법 제정과 함께 본격적인 준비가 가능했어요.

 

Q2. 조선은행권과 한국은행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2. 조선은행권은 일제가 식민 통치를 위해 발행한 화폐로, 발행 주체가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는 조선은행이었어요. 반면 한국은행권은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이 설립한 한국은행이 발행 주체입니다. 도안도 우리 문화와 역사를 담았고, 무엇보다 우리 정부가 통화정책을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핵심적인 차이예요.

 

Q3. 6.25 전쟁이 화폐 제도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A3. 전쟁으로 인한 긴급 자금 수요 때문에 통화량이 급증해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어요. 또한 전시 상황에서 위조지폐 방지를 위한 새로운 화폐 발행이 잦았고, 화폐 개혁도 여러 차례 단행됐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 한국조폐공사가 설립되는 등 자주적 화폐 제조 기반이 마련되기도 했어요.

 

Q4. 화폐정리사업이 조선 경제에 끼친 구체적인 피해는 무엇인가요?

A4. 불리한 교환 비율로 인해 많은 조선인이 재산의 30~50%를 잃었고, 특히 소액 화폐를 주로 사용하던 서민층 피해가 컸어요. 또한 조선의 금은 보유고가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면서 향후 독자적 화폐 제도 수립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전통 상업 네트워크가 붕괴되면서 일본 상품에 대한 경제 종속도 심화됐어요.

 

Q5. 한국은행 설립이 늦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A5. 미군정기에는 정치적 독립이 불완전해 독자적 중앙은행 설립이 제한됐고,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도 한국은행법 제정 과정에서 정부와 국회 간 이견이 있었어요. 재정부와 한국은행의 권한 배분, 독립성 보장 수준 등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다가 1950년에 이르러서야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 화폐 주권 회복의 의미

조선은행권에서 한국은행권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한 화폐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일제에 빼앗겼던 경제 주권을 되찾고, 진정한 독립국가로 거듭나는 험난한 여정이었어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한국은행권 뒤에는 이처럼 아픈 역사와 선조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화폐 주권을 지키는 일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한국 화폐의 역사가 궁금하셨다면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더 많은 역사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구독 버튼을 눌러주시고, 다음 포스팅도 기대해 주세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