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년 구주성의 박서·김경손 등은 몽골군의 포위에 맞섰다. 부대별 방어와 성벽 보수로 함락을 막았다. 이듬해 왕명에 따라 항복했지만, 반복된 공성 공격을 견딘 사례로 기억된다.
이 글은 우리역사넷에 실린 『고려사』 박서 열전을 따르며 2026년 11월에 확인했다.
구주성전투와 귀주대첩의 차이
구주성전투는 1231년 몽골군에 맞선 방어전이다. 우리역사넷에서는 귀주성 전투라는 이름으로도 찾을 수 있다. 강감찬이 거란군을 물리친 1019년 귀주대첩과는 별개다.
| 구분 | 구주성전투 | 귀주대첩 |
|---|---|---|
| 중심 연도 | 1231년, 전투 종결은 1232년 | 1019년 |
| 상대 | 몽골군 | 거란군 |
| 주요 지휘관 | 박서·김경손·김중온 등 | 강감찬 등 |
| 중심 내용 | 성을 지키며 반복된 포위 공격에 대응 | 고려를 침입한 거란군을 격파 |
| 결과를 읽는 기준 | 방어 성공과 이후 항복을 함께 확인 | 거란군을 상대로 거둔 승전 확인 |
두 사건의 구별은 우리역사넷 「박서」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귀주대첩 연표에 근거한다. 우리역사넷 「박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귀주대첩 연표.
고려군은 거듭된 보수로 몽골군의 반복 공격에 맞서 방어를 이어갔다.AI 생성 이미지
몽골의 침입과 구주성에 모인 병력
구주성에 병력이 모인 배경에는 몽골군의 남하가 있었다. 몽골군은 1231년 8월 고려를 침입했다. 침공의 명분으로는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을 내세웠다.
우리역사넷 「몽골의 고려침입」은 더 넓은 배경도 설명한다. 당시 몽골의 금 정벌 준비와 고려 침공을 연결하는 해석이다. 따라서 사신 피살 사건만으로 침공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역사넷 「몽골의 고려침입」.
구주는 고려 서북 지역 내륙의 군사 거점이었다. 서북면병마사 박서는 이곳에 방어 지휘부를 두었다. 인근 지역 병력에 정주에서 물러난 김경손 등도 합류했다.
| 지휘관·병력 | 구주성에서 맡은 역할 |
|---|---|
| 박서 | 모인 병력을 지휘하고 방어 대응을 조정 |
| 김중온의 부대 | 성의 동쪽과 서쪽 방어 |
| 김경손의 부대 | 성의 남쪽 방어 |
| 안북부·위주·태주의 별초 병력 | 성의 세 방면에 나누어 배치 |
이 배치는 여러 지역에서 온 병력을 구역별로 활용한 방식이었다. 구주성 방어를 한 장수의 단독 전공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병력 집결과 배치 내용은 『신편 한국사』의 해설에서 확인된다. 『신편 한국사』 「귀주성·자주성의 승전」.
1231년부터 1232년까지의 전투 연표
구주성 공방은 1231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반복되었다. 왕명에 따른 항복은 이듬해 정월의 일로 설명된다. 아래 월 표기는 당시 기록의 음력을 따른다.
| 시기 | 구주성과 전쟁의 흐름 | 근거 문헌 |
|---|---|---|
| 1231년 8월 | 살례탑이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 | 우리역사넷 「몽골의 고려침입」 |
| 1231년 9월 초 | 구주성 포위와 본격적인 공방 시작 | 『신편 한국사』 「귀주성·자주성의 승전」 |
| 1231년 10월 | 몽골군의 재공격과 성벽 파괴, 고려 측의 보수 | 『신편 한국사』 「귀주성·자주성의 승전」 |
| 1231년 11월 | 포차 공격으로 손상된 성벽을 다시 보강 | 『신편 한국사』 「귀주성·자주성의 승전」 |
| 1231년 12월 | 구주성의 항전과 고려 조정의 강화 교섭이 함께 진행 | 우리역사넷 「박서」·「몽골의 고려침입」 |
| 1232년 정월 | 왕명을 받은 구주성이 항복하고 1차 침입이 종결되는 국면으로 이동 | 우리역사넷 「박서」·「몽골의 고려침입」 |
『신편 한국사』와 우리역사넷 해설을 대조해 연표를 월별로 구분했다. 『신편 한국사』 「귀주성·자주성의 승전」, 우리역사넷 「박서」.
쿠팡 파트너스 광고 · 일정액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포위와 공성 공격에 대응한 방법
고려군은 몽골군의 공격 방식에 맞춰 방어책을 바꾸었다. 공성전은 성을 공격해 점령하려는 전투를 뜻한다. 『고려사』 박서 열전에는 성문 공격부터 사다리 공격까지 나온다.
| 몽골군의 공격 방식 | 기록에 나타난 고려군의 대응 |
|---|---|
| 여러 성문을 향한 공격 | 방어 구역을 나누고 때로 성 밖으로 출격 |
| 성벽 아래로 접근해 땅굴을 파는 공격 | 접근용 장비를 저지 |
| 포차를 이용한 성벽 공격 | 성 위에서 포차로 돌을 날려 대응 |
| 불을 이용한 공격 | 공격 양상에 따라 진흙을 섞은 물이나 비축한 물 사용 |
| 운제라는 공성 사다리를 이용한 접근 | 큰 날이 달린 대우포로 사다리 접근 저지 |
여기서 포차는 돌을 날리는 공성 장비다. 기록 속 명칭을 현대의 화약식 대포와 곧바로 같게 볼 수는 없다. 대우포 역시 이 기록에서는 큰 칼날이 달린 무기로 설명된다. 『고려사』 박서 열전 원문과 우리역사넷 해설.
성벽 보수와 왕명이 바꾼 전투의 흐름
방어를 이어간 핵심은 무너진 성벽을 곧바로 복구한 데 있었다. 『고려사』에는 성벽이 파괴될 때마다 수리한 내용이 나온다. 쇠줄을 이용해 보강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성벽 파괴는 곧바로 성 전체의 함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방어군이 손상된 구간을 복구하며 다음 공격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신편 한국사』는 이 보수 작업에서 주민의 역할을 짚는다. 『신편 한국사』 「귀주성·자주성의 승전」.
전투를 끝낸 전환점은 조정에서 내려온 왕명이었다. 박서는 앞서 회안공 왕정의 문서를 통한 항복 권유를 거절했다. 이듬해에는 최림수와 민희가 왕명을 전달했다.
이미 회안공 정을 보내 몽골군과 화친했고 우리 삼군도 항복했으니, 싸움을 멈추고 나와 항복하라.
『고려사』 권103 「열전」16 박서, 최림수·민희의 항복 권고.
박서는 거듭된 설득 끝에 왕명에 따라 항복했다. 따라서 전투 종결의 직접 계기는 성의 군사적 함락과 구별된다. 이 경위는 『고려사』 박서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역사넷 「박서의 귀주성 전투」.